이제 우리는 세르반테스의 ‘펜은 마음의 혀다’ 를 ‘마우스는 마음의 혀다’ 라고 말한
다. 그리고 켈러가 우리와 함께 있다면 말할 것이다. ‘만화는 나의 유토피아다. 나는 여기
에서는 권리의 침해를 당하지 않는다. 어떤 감각의 장벽도 내 책 친구들의 향기롭고 우아한
이야기를 가로막지 못한다. 그들은 아무런 거리낌이나 어색함이 없이 나에게 이야기를 건넨
다.’ 라고. 이로써 다시 한 번 그 자체에서 시간과 공간의 초월적 축적을 배경으로 한 인터
넷 시대를 실감한다. 이것은 문학 뿐만 아니라 만화에도 빗나감이 없어 보인다. 이제 우리는
몰리에르가 언급한 ‘문학은 문체(文體)의 공화정’을 빌어 만화를 ‘선체(線體)의 공화
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선체(線體)의 공화정’이자 ‘나의 유토피아’인 만화는 인터넷이
라는 나무에 세개의 기둥을 세우고 있다. 그 기둥들은 소외 극복과 문화체적 인식, 그리고
만화행동주의(Cartoon Activity)이다.

허영만은 ‘왜 만화를 그리냐’는 질문에 ‘하얀 종이를 채우는 재미’때문이라고 했다. 창
작자 입장에서 볼 때 아주 솔직한 답변이다. 그러나 결코 가볍지는 않다. ‘하얀 종이’는
시간과 공간이 배제된 빅뱅 이전의 암흑(‘道德經’ 第 一 章 玄之又玄 衆妙之門)이다. ‘채
운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채운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단순히 시간과 공간을 채우는 것
이 아니라 시공의 거멀못인 인류의 모든 것을 채우는 것이다. 박이문의 견해대로 인류의 모
든 것은 ‘문화’를 의미한다. ‘재미’가 의미하는 것은 문화 주체인 인간의 솔직한 자기
토로이다. 이는 상대적으로 문화가 이데올로기나 국가권력의 통제를 거부한다는 능동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재미는 단순히 오락이나 유흥이 아니라 생산과 유통, 소비에서 주체
화이다.

‘만화는 나의 유토피아’

화이트헤드(Alfred Whitehead)의 ‘문명에 대한 생각 없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업의 숫자
를 증대시킴으로써 문명은 진보한다’ 는 말은 인위적인 질서의 계산을 경계하라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서 인위적인 질서는 오늘날 국가의 개입과 자본의 통제와 관련된다. 자본대리자인 국
가장치의 부작용은 액튼 경(Lord Acton)이 지적한 말과 일맥상통한다. 일정한 단일목적이
언제나 국가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었을 때 기간 동안 필연적으로 전제국가가 된다. 만화는
그 전제 국가의 최대 희생자였다. 우리는 만화에 대한 많은 노예적인 사슬을 기억한다. 생
산, 유통, 소비에 이르는 국가의 개입은 만화의 모든 것을 소외시켰다. 허영만의 ‘재미’, 소외되지 않는 ‘재미(주체화)’를 만화가 누렸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만화의 생산-유통-소비와 소외 관계에서 잘 나타난다. 흔히 만화 전문가들은 만화가 문화 생산시스템과 결합되어 대량생산(Mass Production), 대량전달(Mass Communication), 대량소비(Mass Consumption)로 특징 지워지면서 대중문화를 형성해왔다고 한다. 맑스가 말하는 노동물(창작자의 소외)과 생산활동(국가-자본에 종속) 소외론에 비춰본다면 이의 허구성을 통해 우리 만화가 이 세 단계에서 철저히 소외 되어왔다는 사실을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자본체제의 대량생산이요, 자본의 재미이다. 더구나 미국과 일본 자본의 생산이자 ‘재미’이기 때문에 대량수입(Mass Import), 대량유통(Mass Flow), 대량주입(Mass Conformity)을 만들었다. 이를 보고 프롬은 우리만화가 사회경제적인 소외 속에서 자기소외를 당하여왔다고 말할 것이다. 국가는 생산에서 심의라는 칼날로 난도질 하였으며 유통과정에서 만화=저급문화라는 ‘도식’를 유포시키고 유통망을 획일화시켜 만화의 마지막 숨을 조였다. 소비단계에서는 자기소외와 더불어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소외’현상을 부추겼다. 이는 아직도 문화산업 진흥이라는 미명으로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생산, 유통, 소비단계에서 외적소외는 물론 자기소외까지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는 인터넷에서 보고 있다. 물론 만
화행동주의(Cartoon Activity)를 필수요건으로 한다.

인터넷, 상상력이 움트는 하얀 종이

만화에게 인터넷은 시간과 공간의 창조 이전의 하얀 종이다. 창작자는 빅뱅이라는 마우스를
클릭한다. 이로써 인터넷이라는 문화공간체를 얻는다. 그런데 인터넷이라는 백지에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을 채우는 것이 국내외 만화 평론가들이 말하는 만화의 전달매체(Media;
Conmunica-tion)화이며 예술매체화를 의미한다고 볼 수 없다. 만약 이것이 전달체와 예술론
에만 그친다면 커뮤니케이션이론과 회화예술론의 도용일 뿐이다. 우리는 라캉의 눈을 통해
만화가 자신이 세상에 의해 보여짐을 의식할 때 인간은 고립과 소외를 벗어나게 됨을 알 수
있다. 그레마스의 귀로 전달(communication)의 기호학이 아니라 만화의 선체(線體)가 의미
작용(signification)의 기호학이고 롤랑 바르트의 입으로 메타 언어(metalanguage)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다. 만화는 문화체 그 자체다. 인터넷은 문화를 생성 진화시키는 문화공간체이다. 와익(weick)의 미시동기와 거시행동기의 그물코 사이에서 메도우(meadow)의 역동적 구
조 변화를 담보해 낼 새로운 문화체공간이다. 이제 확실히 인터넷의 만화는 ‘전달매체가
아니라 문화 공간체이며 예술체라기 보다 삶의 문화체’라는 인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만화행동주의’위한 작가정신 요구돼

탈소외와 문화체의 영위는 보편적 서비스(Universal Service)문제와 정보 불균형의 역기능 극복과 함께 만화행동주의(Cartoon Activity)라는 작가정신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인터넷의 수많은 만화(線공화정)체(Systems; 웹사이트)를 보면 그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문제이다. 만화행동주의는 세 개의 기둥 위에 지붕을 얹고 ‘선체의 공화정’에서 ‘나의 유토피아’를 ‘우리의 유토피아’로 노래하기 위하여 통찰력(‘道德經’ 不出戶, 天下知, 不窺  見天道)과 작가적 기개(‘山水純全集- 韓拙’ 默契造化, 擧道同機, 握管而潛萬物, 揮毫而掃千里), 근본적 의식 정립과 치열성(‘近思錄’ 第 二 卷 三五 章)이 함께 하며, 엘리어트의 ‘자기 작품에 대한 책임’은 ‘자기책임과 이룸’(‘近思錄’ 第 五 卷 三六 章 責己者, 當知無天下國家, 皆非之理, 故學之於不尤人. 學之至也)에 통한다.

<김헌식 기획위원> codess@press.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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