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드래곤’, ‘쁘띠거니’, ‘용블리’... 모두 한국 재벌을 부르는 별명이다. 재드래곤은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이름과 가수 ‘지드래곤’을 합친 것으로 여기엔 그의 사회적 지위에 나오는 감탄, 스타에 대한 동경과 우상의 이미지가 투영돼 있다. 쁘띠거니는 이건희 삼성 전 회장의 카리스마적 이미지와 대조되는 귀여움을 강조해 반전매력을 준다. 이 별명들은 재벌이 대중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가고 긍정적인 인상을 준다. 재벌의 고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보다 가볍게 소비하는 것에 반전의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즐거움에 찬물을 얹어 보겠다. 독재 정권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며 받은 특혜와 상납, 사과하는 데 11년이 걸린 ‘반도체 백혈병’ 산업재해, 오랜 시간 이어온 무노조 경영. 즐거움에 이런 현실을 끌어오는 것은 껄끄럽기 그지없다. 미국 저술가 조너선 체이트의 재담 중 ‘현실 때문에 기분 좋은 환상을 망쳐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 환상 유지와 현실 은폐는 기득권에게 매우 중요하다. 기득권과 각종 매체의 합작은 그들의 이익 논리에 맞는 믿음을 만들고 이는 일상에 녹아든다.

  재벌을 향한 별명도 그중 하나다. 쁘띠거니는 귀엽지만 동시에 막대한 부를 가졌고, 재드래곤은 국가 경쟁력의 1등 공신이지만 대통령 앞에선 나름 사회생활을 하는 반전매력의 소유자다. 이런 모습을 소비할 때 우리와 재드래곤의 관계성은 현실적 감각보다 유머와 선망으로 대체되고 삼성의 비리나 부패는 그저 먼 이야기가 된다. 삼성의 노동자 중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은 사람, 불안정 고용으로 괴로움을 겪는 사람의 문제는 그네들의 이야기가 된다. 재벌과 기업이 자행하는 불평등에는 무감해지고 그들의 이익 논리에 귀속되기 훨씬 쉬운 상황이다.

  ‘태어나서 가난한 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지만, 죽을 때도 가난한 건 당신의 잘못이다.’ 빌 게이츠의 명언이라며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말이다. 가난의 해결이 사적 영역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 말을 신뢰하고 내면화하는 순간 개인의 통제할 수 없는 불평등 체제와 경제 논리, 이에 관한 책임은 모두 개인의 것이 된다. 그래서 우리에겐 자본가를 향한 보다 비판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사회·경제적 지위의 남용이나 비리에 대한 비난을 넘어 자본가들이 어떤 전략을 취하는지 주목해야 한다. 재드래곤과 쁘띠거니는 현실을 향한 눈을 불투명하게 하는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안정적으로 일할 권리와 죽지 않아도 되는 노동, 공정성이 유지되는 경제 속에서 인격적이고 존엄한 대우를 받는 것. 뻔하고 허울 좋은 명제로 들린다. 그러나 현실에선 결코 당연하지도, 그래서 뻔한 적도 없다. 익숙하게 생각하고 느꼈던 것을 더 의식하고 전략적인 프레이밍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보고 듣는 많은 것에 기득권의 논리가 녹아 있다. 이러한 고찰 없이는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지금 나의 눈을 가리는 것은 무엇인가.

이혜정 뉴미디어부장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