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중대신문은 대학신문의 효시로서 캠퍼스를 넘어 더 넓은 세상을 향해 펜촉을 가리켰습니다. 중대신문이 현재 자리에 오르기 위해 수많은 선배 기자들이 기틀을 마련했죠. 1960년대부터 각 연대별 선배 기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중대신문이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 시절, 선배 기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볼까요? 박환희 기자 joy_park_1222@cauon.net

제2000호를 맞이한 중대신문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모습이 나타났다. 창간 이후 여러 도전을 일궈낸 중대신문이 써온 이야기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중대신문, 그땐 그랬지
  1970~1980년대는 외부 검열로 인해 언론 자유도가 높지 못했다. 홍성억 선배(행정학과 75학번·28기)는 군부독재 시절에 일간지뿐만 아니라 대학신문 역시 검열이 심했다고 이야기했다. “당시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고 흑석동에서도 시위가 많이 일어났죠. 검열 문제로 신문이 발행되지 못할 경우를 염려해 기사를 보도할 때 신경을 많이 썼어요. 올바른 소식을 전달하겠다는 마음으로 신문사 업무에 임했죠” 김채환 선배(무역학과 79학번·32기)는 시대적 상황에 관해 덧붙였다. “특히 1980년대 계엄령이 선포되고 5·18민주화운동이 발생한 후 검열이 심했어요. 대학신문조차 군사정권에 의해 검열을 받은 후 발행할 수 있었죠. 배포금지를 당하기도 했어요.” 

  1990년대 초에 재직한 오창은 선배(국어국문학과 89학번·42기)는 편집 자율권 확보와 주 2회 신문 발행을 했던 시기를 회상했다. “1987년 이후 편집 자율권이 확보되면서 주 2회 신문 발행이 가능해졌죠. 그러나 학생 기자의 과도한 업무 문제 등으로 발행 횟수는 주 1회로 다시 줄었어요.” 

  신문사 생활에 관해 선배 기자들은 다양한 경험을 공유했다. 김삼섭 선배(신문학과 61학번·20기)는 재직할 당시 조직 문화를 이야기했다. “신문사 동기들과 학번이 모두 같진 않았어요. 서로 존칭을 쓰면서 선배님과 같은 호칭을 사용했죠. 신문사 동기들은 군 복무 후 복학했던 저를 ‘김형’이라고 불렀어요.(웃음)” 윤상호 선배(정치외교학과 94학번·47기)는 인상 깊었던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신문사 동기들과 보낸 시간이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죠. 한번은 편집국에 도둑이 든 적이 있어요. 그때 한 동기가 다쳐 급하게 응급실에 갔더니 그날 낮에 싸웠던 의대 관계자가 응급실 당직 의사였던 적도 있죠.” 

  시대 따라 변화하는 신문사 
  신문 작업 환경은 시대별로 변화해왔다. 활판 위에 잉크를 발라 직접 종이를 얹어 발행하는 납판 인쇄 이후 제작 방식이 변경됐다. 홍준의 선배(독어독문학과 88학번·41기)는 재직 당시 신문을 반 CTS 방식으로 조판했다고 말했다. “반 CTS는 자동화의 중간 단계라고 볼 수 있죠. PC를 통해 전면을 디자인하기 전 기사 인쇄물을 지면에 붙이는 방식이었어요.” 

  이러한 작업 환경은 시대 흐름을 선도하며 발전했다. 1997년 중대신문은 최초로 인터넷 홈페이지인 <cauon>을 제작했다. 이에 윤상호 선배는 인터넷이 도입된 초기 시대 변화에 발맞춰 홈페이지를 개설했다고 언급했다. “당시 인터넷이 세상에 나온다는데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죠.(웃음) 초창기에는 지금처럼 온라인 신문 형태는 아니었고 독자에게 공지나 제보를 접수하는 역할을 했죠.” 

  중대신문은 지면 구성과 가독성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이준기 선배(국어국문학과 08학번·61기)는 2009년 재직했을 당시의 신문 크기와 형태 변경에 관해 설명했다. “기존 크기였던 대판에서 현재 신문 크기인 베를리너판으로 신문 판형을 바꿨죠. 이는 단순히 디자인 변화만을 의미하진 않아요. 지면에 들어갈 기사량이 변경되고 이미지 사용 방식도 변화하죠. 디자인부터 기사 배치 방식까지 기초가 잡혔던 거 같습니다.” 

  콘텐츠 제작과 조직 운영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조정호 선배(경영학부 11학번·72기)는 재직 당시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고자 노력했다고 말했다. “신문사 안팎의 다양한 의견을 듣기 위해 힘썼어요. 그 의견이 작을지라도요. 기사 하나에도 다양한 의견과 관점이 들어가도록 노력했죠. 기자를 채용할 땐 성별, 나이, 학번, 전공 등에서 다양성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신문사 내 호칭 변화에 관해서도 설명했다. “이전에는 기자를 지칭할 때 ‘~씨’라는 표현이나 직급으로 주로 불렀어요. 기자들의 요구가 있어 호칭도 ‘~님’으로 통일했죠. 그러면서 수평적이고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가 자리 잡은 것 같아요.” 

  시곗바늘을 되돌린다면? 
  선배 기자들은 기자 활동 당시 느낀 아쉬움과 현직 기자가 놓칠 수 있는 부분에 관해 조언했다. 이준기 선배는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점이 아쉬웠다고 언급했다. “신문에서 다양한 의견을 전부 보도하기 어려워 세부적인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아쉬워요. 그래서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는 신문을 만들면 좋겠어요.” 이어 홍준의 선배도 발로 뛰며 구성원들의 목소리에 더욱 귀 기울였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김채환 선배는 학생기자와 학업 병행에 관해 아쉬움을 언급하기도 했다. “대학생 시절 대부분을 신문사와 함께했기 때문에 수업에 많이 빠진 것과 도서관에 자주 가지 못해 아쉽네요.”

  더불어 선배 기자들은 후배 기자에게 조언했다. 김삼섭 선배는 학생기자로서 최선을 다할 것을 이야기했다. “기자로서 1번뿐인 인생에 온 힘을 다해 노력하길 바라요.” 

  조정호 선배는 중대신문 기자로서 자부심을 느끼고 기자 생활에 임할 것을 덧붙였다. “중대신문은 학내에서도 인정받지만, 전체 대학언론 중에서도 앞서 나가는 축에 속한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학내 구성원뿐 아니라 타대 언론에서도 중대신문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그게 부담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후배들이 이 부담을 설렘을 바꿔 앞으로 나가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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