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꽃 어여삐 붉고 자두꽃 희기도 하구나
  • 최수경 기자
  • 승인 2021.09.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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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을 넘기며
사진출처 다음 영화 '도리화가'
사진출처 다음 영화 '도리화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했던가. 가부장적인 유교의 영향으로 조선에서는 여성이 대중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일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대의 편견을 꺾고 당당히 판소리 명창 반열에 오른 여성이 있었다. 최초의 여류 판소리 명창, 진채선이다. 

  신재효 엔터테인먼트의 예술가로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진채선은 무당이었던 어머니를 따라 소리를 익혔다. 이런 진채선에게 소리를 가르친 스승은 같은 고창 출신인 동리 신재효였다. 이용식 교수(전남대 국악학과)는 신재효가 판소리에 가진 애착이 굉장했다고 설명했다. “신재효는 당시 판소리계의 교육과 흥행에 가장 영향력을 끼쳤던 인물이에요. 현재 이수만이나 박진영에 비유할 수 있죠. 게다가 판소리의 변화를 꾀하면서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판소리를 여성인 진채선에게도 가르쳤어요.” 

  기생이 판소리를 불렀다는 기록은 종종 남아있지만 정식 소리꾼으로 활동한 진채선은 여류 명창으로서 그 가치가 크다. 진채선의 데뷔 무대는 무려 흥선대원군이 열었던 경복궁 경회루 낙성연이었다. 

  최혜진 교수(목원대 기초교양학부)는 당시 진채선의 차림새가 남성복이었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공식적으로 여성이 판소리를 하지 않을 때라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양반 남성 복장으로 소리를 했을 가능성이 크죠.” 남성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고 풍부한 기교로 웅장했던 진채선의 소리는 대원군의 귀를 사로잡았고, 소문을 타고 지방까지 전해졌다. 

  서울에서 이름을 떨친 후에도 진채선은 고향에 내려와 큰 연회에 소리를 하러 다녔다. 그녀의 최후에 관해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최혜진 교수는 진채선이 마지막까지 명창의 대접을 받았을 것이라 짐작했다. “진채선은 서울에서 유명한 명창이라 함부로 할 수 없는 국창 반열에 올랐어요. 여러 잔치에 공연을 다니며 누군가 자신을 희롱하면 단호히 거절하기도 하는 자존감 있는 여성 소리꾼었죠.” 

  신재효는 이런 진채선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져 단가 <도리화가>에서 그녀의 아름다움을 봄 경치에 빗댔다. ‘도화는 곱게 붉고 희도 흴샤 오얏꽃이 / 향기 쫓는 세요충은 젓대 북이 따라가고 / 보기 좋은 범나비는 너픈 너픈 날아든다’ 

  여성 소리꾼 시대의 문을 열며 
  진채선과 스승 신재효의 영향으로 여성 소리꾼들이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다. 진채선의 후배라고 할 수 있는 허금파는 명창 이동백과 함께 녹음한 <춘향가>의 기록이 남아있기도 하다. 본격적으로 여성 명창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여성이 소리꾼이 된 후 판소리에서 남녀의 역할을 나눠 소리를 할 수 있게 됐다. 최혜진 교수는 이러한 분창이 음악적인 발전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분창의 기회가 생기며 창극이 발생했다고 볼 수도 있어요. 또 아무리 성량이 웅장하다고 한들 여성이 낼 수 있는 소리에는 한계가 있죠. 분창을 함으로써 여성이 표현할 수 있는 음역과 정서적 표현이 더 풍성해졌어요.” 

  진채선의 행보는 여성이 판소리 명창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또한 당대의 유리벽을 뚫고 여성이 전문 직업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가히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 9월 1일은 진채선 선양회에서 선포한 진채선의 날이다. 그녀가 남긴 복숭아꽃, 자두꽃 향기가 생생히 다시 살아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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