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평양도십첩병풍 중 '모흥갑 판소리'도'에 나타난 판소리 연희 장면. 중앙에서 고수가 북을 치고 소리꾼이 노래를 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평양도십첩병풍 중 '모흥갑 판소리'도'에 나타난 판소리 연희 장면. 중앙에서 고수가 북을 치고 소리꾼이 노래를 하고 있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또는 들어서 알고는 있는데 자세히는 알지 못했던 예술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그럴 땐 키워드로 보는 예술 사전을 펼쳐보는 건 어떨까요. 이번 주 예술 사전을 넘기는 손은 키워드 ‘국악’ 앞에 멈췄습니다.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인 국악과 그중 한 갈래인 판소리, 소리꾼 이야기를 다루는 예술작품 <서편제>와 최초의 여류 명창이었던 진채선까지. 국악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그럼 우리 함께 국악을 한번 파헤쳐 봅시다!

“박을 흥보가 탁 타노니, 
박통 속으서 왼갖 돈과 쌀이 막 
나다려 오는디. 
흥보가 좋아라고, 흥보가 좋아라고” 

 <흥보가> 중 박타령

고대부터 우리 민족은 음악이 신과 통하는 언어라고 여겼다. 삼국시대에는 음악을 국가 위엄의 상징으로사용했고 기악 연주에 가무를 곁들인 악무 형태도 등장했다. 고려 시대 이후에는 아악을 받아들여 국가 주요 제사에 연주하기도 했다. 이렇게 국악은 아악, 당나라에서 전해진 당악, 우리 고유의 음악인 향악, 그리고 한국 창작 음악까지 포함한다. 

  국악은 지성을 강조한 정악과 감성이 풍부한 민속악으로도 나뉜다. 선비문화에서 나타나는 정악은 정적이고 차분한 박자로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서민문화와 관계가 깊은 민속악은 즉흥감성적이며 시나위, 산조 독주 그리고 ‘판소리’가 속한다. 

  판소리 소리판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한국관광공사 홍보영상에서 이날치 밴드가 연주한 <범 내려온다>의 일부분인데 <수궁가>의 구절이기도 하다. 홍보영상이 큰 인기를 끌면서 판소리가 전 세계인을 매료시켰다.인간의 목소리로 표현한 판소리는 무엇보다 인간적인 예술이다. 

'한국관광 해외홍보 영상 in 서울'의 한 장면이다. 배경음악으로 쓰인 이날치 밴드의 '범 내려온다'는 판소리 '수궁가'를 새롭게 편곡한 곡이다.
'한국관광 해외홍보 영상 in 서울'의 한 장면이다. 배경음악으로 쓰인 이날치 밴드의 '범 내려온다'는 판소리 '수궁가'를 새롭게 편곡한 곡이다.

 

  판소리는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마당을 뜻하는 ‘판’과 인간의 목소리를 뜻하는 ‘소리’를 합한 말로 이야기를 노래하는 공연예술을 의미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생활이 어려워진 백성들은 정처 없이 떠돌  며 걸식했다. 당시 부르던 노래 풍습이 사당패와 같은 놀이 집단을 만들었고 해당 흐름에서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판소리가 발달했다고 볼 수 있다. 김준호 국악인은 ‘굿’에 그 이유가 있다고 설명했다. “문화예술은풍족한 곳에서 나오기 마련이죠. 그래서 우리나라 곡창지대인 호남지역이 음악적으로 굉장히 발달했어요. 특히 굿이 매우 발달했는데 무당이 사설을 읊는 부분이 커지고 이야기를 갖추면서 판소리로 태동한 겁니다.” 

  판소리에도 ‘스타일’있다 
  영화 <서편제>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한 맺힌 소리를 위한 송화의 아름답고도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다. 제목 <서편제>는 판소리 유파 중 한 갈래인 서편제를 뜻한다. 이러한 ‘제’는 판소리의 전승 계보나 스타일을 말한다. 판소리 유파는 크게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로 구분한다. 

  판소리의 ‘제’는 가장 먼저 창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동편제는 힘차고 깨끗하며 특별한 기교 없이 담백한 ‘우조’를 추구한다. 서편제는 부드러우며 아름답고 화려하게 노래하는 ‘계면조’를 추구한다. 중고제는 동편제도 서편제도 아닌 그 중간의 소리로 비교적 동편제에 가깝다. 

  ‘제’에 관한 기준으로 전승 지역을 따지기도 한다. 동편제는 섬진강의 동쪽, 서편제는 섬진강의 서쪽에서 전승되는 음악이다. 이용식 교수(전남대 국악학과)는 지역 특성이 창법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동편제는 지리산의 산맥을 중심으로 전승되기에 씩씩한 창법이 특징이에요. 그렇다보니 <적벽가>와 같은 전쟁 이야기에 어울리죠. 서편제는 호남평야를 중심으로 전승돼 창법이 화려하죠. <춘향가>나 <심청가>같이 애절한 이야기에 어울려요.” 중고제의 의미에는 ‘중앙의 위쪽 소리’ 또는 ‘중앙의 오래된 소리’라는 주장이 있는데 어떤 의미든 경기⸱충청 지방의 소리를 말한다. 최혜진 교수(목원대 기초교양학부)는 중고제 소리가 동편제⸱서편제와 달리 서민 음악과는 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중고제가 동편제와 서편제 이전의 소리이기 때문에 담백하고 장식이나 기교가 별로 없어요. 옛날 양반의 시조나 가사류를 표방하는 정가풍의 발성이 많았죠. 현대로 올수록 소리에 장식이나 기교가 많아졌어요.” 

  동편제와 서편제는 많이 알려진 데 비해 중고제는 아직 흔적을 찾는 중이다. 최혜진 교수는 일제 강점기 당시 중고제가 경쟁력을 잃어 전승이 잘 되지 않았다고 추정했다. “중고제가 사라진 시대가 일제 강점기 부근인데 당시 식민지 설움에 따라 구슬픈 음악이 유행했죠. 그에 비해 중고제는 발성이 씩씩하고 높아 시대의 요구에 잘 맞지 않았어요.” 지금은 중고제 소리의 흔적을 다시 살리려는 노력이 희박하지만 여전히 진행 중이다. 

  판소리의 이중생활 
  판소리는 양반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만든 예술극이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양반 지식인층에 판소리가 퍼지고 궁중으로까지 유입되며 모든 계층이 즐기는 예술로 자리매김했다. 김준호 국악인은 판소리의 ‘이중구조’를 이유로 들었다. “<흥보가>는 겉으로는 권선징악을 표현하지만, 가난에 대한 서러움을 담고 있죠.한마디로 서민의 아픔을 담고 있기도 하지만 양반이 추구하는 유교적 가치관을 담고 있어요.” 

  판소리는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 다섯 마당만 전해지지만 원래 열두 마당이었다. 다섯 마당만 남은 이유에 관해 김준호 국악인은 외설성과 서사의 부실성을 들어 설명했다. “변강쇠타령 같은 경우는 경찰에 잡혀갈 정도로 외설적이에요. (웃음) 그리고 서사가 약한 것들이 사라졌죠.” 

  판소리 속 서사는 사료로서도 큰 의미가 있다. 김준호 국악인은 판소리의 자세한 묘사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고 답했다. “조선 시대 아녀자 방 생김새는 잘 모르잖아요. 그런데 <춘향가>를 보면 다 나오죠. <흥보가>에는 죄지은 사람의 몫을 대신 맞는 매품팔이도 묘사돼 있어요. 판소리는 조선 중기 이후의 역사 백과사전인 셈입니다.” 

  느슨해진 판소리에 긴장감을 주다 
  최근에는 판소리에 피아노, 밴드 등 다른 음악을 결합한 색다른 판소리가 나타나고 있다. 김준호 국악인은이러한 움직임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판소리가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젊은 세대가 좋아하는 음악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국악이 가지고 있는 저변의 힘이 대단하기 때문에 다른 음악과 결합하는 과정에서 판소리가 중심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판소리는 단순히 음악이라는 장르를 넘어 인간의 철학과 인생이 담긴 문화유산이다. 김준호 국악인은 전통문화를 향해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부탁했다. “선조들이 살아보고 가장 이상적인 것만 남긴 것이 전통입니다. 판소리뿐만 아니라 전통문화 자체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습니다.” 첨단기술이 가득한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전통문화를 등한시한 채 바쁘게 살고 있을지 모른다. 잠시라도 휴대폰을 놓고 흥겹고 정겨운 판소리를 들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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