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칼럼을 쓴지 벌써 5개월이 지났습니다. 하루는 긴데 항상 돌아보면 시간은 훌쩍 지나간 듯 보입니다. 약 5개월 전 이곳에 우울증에 대해 적었습니다. 암울한 시기를 지나 꽤 잘 살고 있다고 적었죠. 하지만 그 글이 무색하게 또 몹시 아픈 시기가 오기도 했습니다.

  인생은 좋은 시기와 그렇지 않은 시기의 반복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사실 ‘시기’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좋은 날과 그렇지 못한 날의 반복, 혹은 좋은 찰나와 그렇지 못한 찰나의 반복. 시시한 말이지만 좋은 찰나를 음미하고 기억하는 게 우리의 몫이겠죠.

  오늘 기자에게 찾아온 좋은 찰나는 꽤 묵직했습니다.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학원을 그만두게 됐는데 학생 1명이 안겨 울었습니다. 누군가의 울음이 좋은 찰나라니. 조금 이상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누군가 필자를 미리 그리워해 준다는 사실이 참 슬프고 좋았습니다. 너무나도 나약한 어른인 스스로가 누군가에겐 안겨 울 수 있는 큰 품이 될 수 있음을 새삼 느꼈습니다.

  슬프게도 어떤 날의 좋은 찰나는 희미합니다. 고작 점심때 먹었던 ‘하트 모양 계란말이’ 가 그날 행복의 전부일지 모릅니다. 그조차 없는 날들이 반복되기도 합니다. 얼마나 그런 날이 고통스러운지 알지만, 그럼에도 또 다시 시시한 말을 건넬 수밖에 없습니다. 곧 좋은 날들이 온다고. 묵직하게 좋은 순간들 이 찾아올 거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건 길진 않지만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삶의 경험을 통해 사실임을 알았습니다.

  기자의 품이 그러했듯 우리의 품은 항상 누군가가 안겨 울 수 있는 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품이 정작 자신을 품어주기엔 좁지 않았나요? 우리의 품은 자신에게 너무 인색합니다. 당장의 실패에 자신의 본질과 미래를 정해버리고 토닥여도 모자랄 순간에 채찍질로 상처를 냅니다. 나와 평생 함께인 것은 오로지 나 자신밖에 없는데, 이토록 소중한 나를 모질게 대하진 않으셨나요?

  기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자기보다 그 밖의 것들을 더 아끼는 것 같습니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나 진정으로 원하는 것보다 연인, 친구,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 등을 먼저 고려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나 자신보다 중요할 수 없음을 우린 매일 반복해서 기억해내야만 합니다.

  내 삶이지만 내가 먼저가 아니었던 모든 분께 이 글을 바칩니다. 오늘 어디에서도 하트 모양 계란말이조차 찾지 못했던 여러분이 다른 어떤 곳도, 다른 어떤 사람도 아닌 자신의 품에서 좋은 찰나를 찾길 바랍니다. 좋아하는 작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지속되는 삶의 궤도 위에서 온 힘을 다해 커브를 도는 일은 누구에게나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절대 쉽지 않겠지만, 결국 그 무엇도 아닌 나에게서 하루의 행복을 찾는 일. 우리는 꼭 해낼 수 있을 겁니다.

정유진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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