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옆 상가에 사는 빵집 아주머니가 필자에게 물었다. “혹시 지하에 사는 이웃 아저씨 본 적 있어요?” 답할 수 없었다. 최근 이웃 아저씨를 본 적 없을뿐더러 심지어 아랫집에 사는 분이 아저씨인 것도 그날 아주머니를 통해 알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사는 사회를 꿈꾸는 필자조차도 이웃에게 관심 없는 개인주의자였다는 것을 그날 깨달았다.

  개인주의란 개인의 가치를 국가나 사회보다 중요시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는 민주주의가 꽃피면서 자연스레 권리로서 다가온 ‘나’라는 개인의 자각에서 시작됐다. 특히 개인주의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들의 특성을 대표한다. 오늘날 개인은 자율성을 보장받아 독립적인 개체로서 존중받는다. 개별 주체로서의 인식은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태도로 이어졌다.  

  사실상 개인주의는 개인 특성만이 아닌 사회 현상이 됐다. 그러나 이는 오늘날 다른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그 양상은 현대 사회에서 개인주의가 지나쳐 극단적 개인주의로 왜곡되는 모습들로 나타났다. 오늘날 일부 극단적 개인주의자는 자신의 행복과 이기적 욕구를 좇으며 살아간다. 그들은 자신과 가족만 신경 쓰며 공익보단 사익이 우선되는 사회를 지향한다. 

  이러한 개인의 독립성이 이기주의와 타인에 관한 무관심으로 변해  사회 문제를 초래하기도 했다. ‘이웃 살인’ 키워드를 검색하면 수많은 기사가 지나친 개인성의 단면을 보여준다. 1964년 뉴욕에서 제노비스는 한 남성에게 폭행당했다. 당시 그녀가 주변에 도움을 청했지만 이웃들은 이를 지켜보기만 했다. 2016년 전주에서는 A씨가 어린 이웃이 인사하지 않고 건방지다는 이유로 이웃을 살해했다. 지난겨울 B씨는 주차 문제를 항의했다는 이유로 이웃에게 흉기로 찔렸다. 이 사례들에서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 극단적 개인주의가 서로를 해칠 수 있는 점, 그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현시점에서 지금의 개인주의 행보를 검토하고 방향을 새로 찾는 게 필요하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다정한 무관심』(한승혜 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 세상 누구도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신세를 지지 않는 무해한 존재로 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최대한 자신의 해로움을 줄이려 애쓰는 것, 그럼에도 타인에게 기대고 폐를 끼칠 수밖에 없는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직시하는 것, 동시에 타인을 감내하고 이해하는 걸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타인에게 의지하는 한계를 깨닫고 남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때로는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더불어 살기 위해 노력하는 건 어떨까? 무조건 공동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라는 게 아니다. 연대와 상호 존중과정에서 진정한 개인주의가 발현되고 개인이 온전한 개체로서 인정받기 위해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도 겸비하라는 뜻이다. 글을 읽는 당신이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세상의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함께 노력하길, 성숙한 개인주의자로서 거듭나길 바란다. 

 

이정서 대학보도부 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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