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영화와 대안 영화의 지향을 표방한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행복한 며칠을 보냈다. 급진적인 정치적 영화와 뛰어난 예술 영화들 뿐만 아니라 평소에 접하기 힘든 세계적 수준의 애니메이션과 디지털 영화들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프랑스 영화 ‘로망스’를 관람하는 순간에 벌어졌다. 거의 2천여명의 관객이 빽빽하게 들어찬 극장에서 상영되던 영화는 그 제목과는 달리 성기 노출과 갖가지 도착적인 성행위에 이르기까지 그 수위에 있어서 거의 하드 코어 포르노였기 때문이다. 국제영화제라는 공식적인 장에서, 수많은 사람이 앉아서, 커다랗고 질좋은 화면으로 함께 포르노를 보게 되다니 …

따라서 이 영화를 보고 있던 98분은 상당히 충격적인 문화적 체험이자 복잡한 생각과 느낌들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숨죽이고 화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머리 속을 상상해보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이 사건이 갖는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라는 생각 역시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 얼마전 한 일간지의 “음란물 터놓고 토론하자”라는 시론에서 그 필자는 “어느 사회든 포르노는 있다. 문제는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느냐, 없느냐”라고 진단하면서, 현실적으로 포르노에 대한 규제는 불가능하므로 오히려 터놓고 토론하는 것이 바림직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동아일보, 4월 25일자)

사실 인류의 역사에서 포르노만큼 항상 논쟁적이면서도 뜨거운 관심을 받아온 영역도 드물 것이다. 포르노는 표현의 자유와 성의 정치학 그리고 외설과 예술간의 경계와 같은 폭넓은 이슈들을 둘러싸고 첨예한 입장의 차이들을 낳아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론 필자의 제안처럼 부정할 수 없는 포르노의 존재를 인정하고 공적 영역에서 이에 대한 논의를 열어놓는 것도 당연히 필요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우리 사회에서 성에 대한 사고와 접근 자체가 성숙해지는 일일 것이다.

성은 생물학적인 본능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성에 대한 정의와 기준을 둘러싼 투쟁이 역사적으로 그친 적이 없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철저하게 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성은 인간 관계에 대한 설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제이자, 특히 현대 이후에는 개인의 자아나 정체성의 문제와도 분리될 수 없는 주제이다. 그런 만큼 성은 그 어떤 것보다 간학문적인 접근이 필요한 지식의 영역이자 한 개인의 자율성과 한 사회의 민주주의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정치학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성에 대해 누구나 관심은 갖고 있지만 누구도 제대로 말하지 않는 현실, 더 나아가 성에 대한 논의가 특정한 소수만의 권리가 되거나 성적 표현물에 대한 평가가 여론 재판의 형식을 띠게 되는 현실,

따라서 이 모두는 시대착오적인 것에 불과할 것이다.

주유신 <예술대 영화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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