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김예령 기자

어느덧 2021년도 여름의 길목에 서 있습니다. 그간 치열하게 달려온 여러분도, 중대신문도 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는데요. 사회부는 2021년 1학기 마지막 지면을 빌려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올리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중대신문은 인권과 관련하여 다양한 사회문제를 기사화하거나 소수자 관련 사안에 꾸준히 목소리를 내왔습니다. 지난해에는 ‘2020 올해의 인권지기’에 선정되기도 했죠. 인권센터는 2012년 설립 원년부터 매년 학내 인권 및 성평등 의식 확산을 목적으로 인권지기를 지정하고 있는데요. 중대신문은 인권을 존중하는 캠퍼스를 조성하며 인권의식을 확산하는 데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선정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중대신문이 인권지기로 자리할 수 있었던 건 바로 독자 여러분, ‘당신’ 덕분이었습니다.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여러분과 함께한 ‘나도 한마디’를 아시나요? ‘나도 한마디’는 학내 구성원들이 어느 사안에 대해서든 자유롭게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기고란입니다. 기자는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당신이 ‘나도 한마디’ 위에 남긴 발자취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 봤습니다. 

  수많은 기고 중 총 23분이 ‘나도 한마디’를 통해 차별, 인권, 그리고 사회적 약자 등의 사안에 목소리를 내주셨는데요. 일부를 발췌해 그 내용을 살펴봤습니다. 주제는 여성·장애인·노인 차별, 아동 인권 문제, 성소수자 등 다양했습니다. 이야기를 실어주신 모든 당신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다시금 당신의 말을 곱씹어 보고자 합니다. 

  당신께서는 혐오 발언 ‘XX충’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벌레를 뜻하는 한자 충(蟲)은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의 접미사처럼 공공연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충 앞에 붙은 대상에 혐오감을 드러내는 이 표현은 우리 사회 속에서 타인에 대한 혐오감이 커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죠. 뒤틀린 혐오가 타인을 미워하는 증오의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혐오로 뒤덮인 현실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견해를 펼쳐주셨습니다. 

  불리한 위치에서 싸우고 있는 이들에게 왈가왈부하고 싶다면 그 배경과 맥락을 명확히 봐야 한다는 글도 남겨주셨는데요. 누군가 ‘남혐’과 ‘여혐’으로 편 갈라 싸우지 말라는 말을 하고 있다면, 그는 세상이 평화롭지 않다는 것을 모를 만큼 순진하거나 알고 있음에도 모르는 척하는 중일 거라 지적하셨습니다. 우리가 공평한 시선으로 보고 있다고 믿는 세상이 사실은 정말 불공평할 수 있기 때문이죠.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논의를 펼쳐주신 당신도 있었습니다. ‘정상적’이라는 단어 속에 사회 내에서 일종의 고정관념으로 굳어져버린 생각의 틀로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폭력성이 숨어있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특정한 ‘정상’ 속에 포함되기 위해 노력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차별하곤 하죠. 정상적이라는 편견에 갇혀 모든 걸 판단하는 폭력성이 진짜 위험한 괴물은 아닐까 하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주셨습니다. 

  더욱 ‘편리한 생활’을 제창하는 기술 발전의 이면에는 삶이 더욱 ‘불편’해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당신의 의견도 귀담아들었습니다. 과학기술과 세상이 발전할수록 노인의 디지털 소외 현상이 더더욱 심화하고 있다는 것이죠. 지금 우리 인간이 어느 단계에 놓여있는지, 모두에게 진정으로 좋은 일이 무엇인지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깊은 이야기를 전해주셨습니다. 

  인권 감수성을 논해주신 당신의 이야기도 늘 마음에 품고 기억하겠습니다. 어떤 사안을 인권 관련 문제로 인식하고 그를 재해석해 다른 상황을 상상하고, 자신과 연결 지어 책임을 공유하는 역량을 인권 감수성이라 정의해주셨는데요. 아직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생각한대로 행동하기까지 상당한 간극이 있어 보이기에 자신을 둘러싼 말과 행동을 하나씩 곱씹고 훑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중대신문이 2020년 인권지기로 선정된 만큼, 사회부 기자들은 사회부로서 가져야 할 막중한 책임감과 그 위치를 항상 가슴속에 상기시켰습니다. 이번학기 사회부는 사회 속 차별을 지적하고 약자의 목소리를 담아내기 위해 '당차다'라는 꼭지로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당차다는 마음가짐이나 하는 짓이 야무지고 올차다는 뜻인데요. ‘당연한 차별은 없다’를 줄여 당차다를 모토로 삼은 채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던 당연하지 않은 차별을 마주보며, 당차게 사회문제를 꼬집었죠. 언어 속 차별, 선거권·피선거권 연령제한, 한부모들의 이야기, 젠더갈등, 성소수자 등 다양한 주제를 공부하고 소중한 취재원들의 답변에 귀 기울이며 매주 온 마음을 다해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당신이 당연하게 여겨왔던 일이 누군가에겐 차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차별받아 마땅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를 알기에 약자의 시선에서 사회를 바라보며 함께 목소리를 내야 하는 거죠. 앞으로도 중대신문은 차별을 바로잡고 모두의 인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소수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겠습니다. 그렇게 발맞춰 가다 보면, 거리가 좁혀지다 보면 언젠가는 그 차이의 장벽을 허물 수 있겠죠. 

  지금 우리는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 서 있습니다. 저 멀리 누군가 달려가네요. 중대신문 사회부가 그 폭을 따라잡겠습니다. 기울어진 각도를 바로 하겠습니다. 

  너도 나도 한마디 담장 없는 사회를 향한 우리 모두의 이야기
  당신은 공평한 시선으로 보고 있다고 믿는 세상이, 사실은 정말 불공평할 수 있다. 그런 불리한 위치에서 싸우고 있는 이들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다면 배경과 맥락을 명확히 봐야 한다. 어렵지 않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권력을 학습해왔고 구조를 체득해왔기에 더 잘 알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남성이라면 온라인의 담론 너머 존재하는 현실 세계를 바라보아야 한다. 온라인 속 페미니즘의 언어에 대한 판단은 잠시 보류하자. 결국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건 현실이기에 허울 좋은 담론장인 인터넷상의 전쟁에 분노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제1877호(2016년 8월 29일 발행) 전명환 님 

  우리가 정상이라고 받아들이는 모든 것은 초역사적인 진리가 아니다. 결국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상’을 삐딱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마치 모든 것에 정답이 있는 것처럼 여기고 남과 다르다는 걸 두려워하는 심리가 우리 사회에 가득하다. 자연스럽게 대다수를 차지하는, 소위 정상적인 사람들에 속하지 않는 모든 이들은 괴물 취급을 받는다. 성 소수자, 장애인, 이주 노동자 등은 서로 다른 위치에 처해있지만 공통적으로 그런 정상의 논리에서 벗어난 자들이다. 그들의 유일한 잘못은 사회 구성원의 다수를 차지하는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 뿐이다. 
  …어쩌면 정상적이라는 편견에 갇혀 세상 모든 걸 판단하는 폭력성이 진짜 위험한 괴물은 아닐까. -제1834호(2014년 11월 24일 발행) 정성조 님 

  뒤틀린 혐오는 일시적이면서도 개인적인 해소법이고, 타인을 지속적으로 미워하는 증오의 악순환으로 이어질 뿐이다. ‘XX충’으로 대표되는 혐오문제는 우리 사회가 직면해야 할 만연한 문제이므로 이제 우리는 왜 서로가 미워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구성원들에게 혐오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지금 사회라면, 우리는 미래의 주역들이 더 이상 미움 속에서 자라지 않도록 뒤틀린 현실을 바로잡아야 한다. -제1884호(2016년 11월 14일 발행) 박서영 님

  징계권 조항이 삭제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체벌 문화가 사라지지 않는다. 법을 고치는 것만큼이나 부모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자녀를 부모의 소유물로 여기는 인식을 버리고, 자녀를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해야 한다. ‘사랑의 매’란 드라마 속의 “사랑해서 헤어지는 거야”라는 진부한 멘트만큼이나 역설적이고 모순되는 말이다. 학원 강사로 일하면서 긍정적 강화를 통해 교육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느낀다. 이 글은 미래의 양육자가 될 나에게 스스로 하는 약속이다. 부모에게 ‘사랑의 매’는 없다. -제1978호(2020년 11월 9일 발행) 오은지 님 

  우리의 일상에는 점점 사람보다 기계를 마주하는 일이 많아지게 됐다. 물론 예전처럼 무작정 기다릴 필요도 없고 기계가 빠르게 일을 처리해주니 ‘빨리빨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발전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더욱 ‘편리한 생활’을 제창하는 기술 발전의 이면에는 삶이 더욱 ‘불편’해지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바로 ‘노인’들이었다. 
  …요즘 팔순이 넘으신 우리 할머니께서는 친구들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는 일에 푹 빠져계신다. 이제는 당신 스스로 짧은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에 큰 재미를 느끼신 듯하다. …할머니께서는 늘 ‘너거들이 옆에 붙어서 갈쳐 주니까 이래 하지, 아이면 몬한다!’며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하나를 알려드려도 뒤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당신의 모습을 자책하면서 하시는 말씀이었다. …비단 우리 할머니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지금 우리 인간은 어느 단계에 놓여있는지, 모두에게 진정으로 ‘좋은 일’인지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제1930호(2018년 11월 5일 발행) 김혜린 님 

  인권침해를 하고도 이를 보지 못하는 선량한(?) 인권침해자가 나오지 않기 위해서는 각자 ‘나’를 둘러싼 수많은 말들과 행동 등을 하나씩 곱씹어 보고 훑어보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아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생각한대로 행동하기’까지 상당한 간극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죠. 
  인권 감수성을 투박하게 정의해 보면 ‘인권 문제, 또는 그 징후를 감지하고 이에 반응하는 민감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권의 언어로 다시 풀어써보면 ‘어떤 사안을 인권과 관련한 문제로 인식하고, 그 사안을 재해석해 다른 상황을 상상하고, 자신과 연결지어 책임을 공유하는 역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사안을 바라볼 때 누군가가 누구에게 한 말과 행동으로 인해 그 누구의 인권이 결여되고 무시되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해야합니다. 동아리, 학생회, 중앙대 구성원, 시민, 국민으로서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러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모두가 보게 하여 ‘나’ 스스로 관계자임을 받아들이고, 그 사람의 인권을 지지하고 촉진해야 할 개인적·사회적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다시 풀어쓴 인권감수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1981호(2020년 11월 30일 발행) 김종일 인권센터 전문연구원 

  영화 속에 장면은 우리나라 현실 속의 작은 단면일뿐이다. 사회적 약자인 아동, 장애인, 여성 등이 겪고 있는 다양한 어려움과 고통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의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는 기득권층을 움직일 수 있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처럼 작은 관심에서 시작되는 작은 실천들이 하나둘씩 모인다면 모두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제1748호(2011년 10월 4일 발행) 김경아 님 

  가해자를 인권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태도는 피해자에 대한 지원과 재발 방지 대책을 고민하기보다는 가해자에 대한 응징을 우선시하는 것이다. …인권은 나와 당신, 가해자 모두에게 있는 권리이고 처벌은 어디까지나 공적 권력의 몫이다. -제1858호(2015년 11월 2일 발행) 표석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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