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동굴이란, 동굴 속에 갇힌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보는 것들이 사실 동굴 속에서 본질인 이데아에 빛을 비춰 생긴 그림자와 같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 플라톤의 동굴 개념은 사진에 관해 논할 때 자주 등장하곤 한다. 사진이 본질을 인식하는 인간의 개념을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사진의 발명 이후, 사람들은 ‘보다’라는 행위를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보는 것은 더 이상 경험의 영역이 아닌 증명과 기록의 영역이 됐다. 사진의 등장으로 보는 행위는 시의성이 사라지고 체험은 기록으로 대체 가능해졌기에, 이제 경험은 기록을 위한 것이다. 사람들은 좋은 전시가 아닌 예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전시장을 찾아간다. 여행지에서 가족과 싸우거나 쉬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사진 명소는 꼭 가야 한다. 사진은 현재를 소유하기 위한 하나의 의례가 되었고 본질은 그림자를 만들기 위한 요소로 격하됐다.

  사진의 세계에서 인간은 이미지의 축적, 즉 세계의 수집에 집착한다. 21세기 모든 사진은 인터넷에 저장된다. 인터넷 속 사진은 너무 산개되어있고 너무 다양하고 너무 가지기 쉽다. 과거 전시와 보관의 대상이었던 사진은 이제 의미 없는 무신경한 아카이빙의 대상이 되었다. 마치 생생한 미라처럼 인터넷의 사진은 메타데이터라는 인식표를 달고 영원히 항해한다.

  촬영으로 기록을 남기면 그 과거는 내 소유가 된다. 이 활동은 촬영자로 하여금 마치 권력을 가진 것처럼 느끼게 한다. 사진은 개인과 세상의 특수한 관계 속에서 개인이 수집한 세상이 새롭게 창조된 세계다. 그래서 세상에 존재하는 촬영자의 수만큼, 현실을 변형한 개인의 세상, 즉 주관적인 본질도 존재한다. 세상을 보고 싶어 사진을 찍었지만 결국 그 사진 속 세상은 머릿속에서 재가공된 것이다. 사진 발명 전의 인간이 모두 같은 진리를 보고자 했다면, 사진 발명 후의 인간은 촬영을 통해 각자의 이데아를 마음에 품고 산다.

  사람들은 사진이 투명한 유리창처럼 세상을 완벽히 보여준다 여기고, 거기에서 사진의 영향력과 매력이 나온다 생각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사진은 개인이 주장하는 교묘한 이데아와 같다. 사진은 객관적 진실을 담지 못한다. 사진은 분명히 현실을 복사하지만 동시에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도 마치 지문처럼 프레임에 고스란히 남는다. 소위 ‘포토샵’을 거치지 않은 사진이라고 마냥 주관이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이미지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사진의 메시지는 곧 사진의 공격성이다. 카메라와 세계가 창작의 재료인 촬영은 실존에 대한 침해다. 피사체의 의견과 상관없이 그 피사체에 새로운 개념을 덧씌워 새롭게 정의하는 사진의 원리는 흡사 폭력이라고도 볼 수 있다.

김수현 대학보도부 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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