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은 일상에 항상 스며있었다는 사실. 여러분은 알고 계셨나요? 선조들이 전해준 전통을 우리네 삶 속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번 생활면에서는 본인의 자리에서 전통을 계승하는 장인을 만났습니다. 정길자 궁중병과연구원장님이 그 주인공인데요. 일생을 궁중 음식 연구에 힘쓰셨다고 합니다. 전통의 맛에 빠질 준비 됐나요? 그 여정으로 함께 떠나봅시다! 서민희 기자 tjalsgml0928@cauon.net
 

정길자 원장이 두텁떡을 만들고 있다. 두텁떡은 거피팥고물을 뿌린 다음 찹쌀가루와 소를 넣은 후 팥고물을 얹어 찐 떡이다. 사진제공 궁중병과연구원

전통은 고리타분하게 죽어있는 유물이 아니다. 한때 찬란하게 꽃피웠던 역사는 시간 저편의 뒤안길로 저물었지만 전통이라는 씨앗이 살아남아 우리 삶으로 움튼다. 궁중 나인들 사이에 계승되던 궁중 음식은 조선 왕조가 몰락하면서 명맥이 희미해졌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고(故) 한희순 주방 상궁에게 궁중 음식을 전수받은 고(故) 황혜성 교수를 통해 전통의 불씨가 되살아났고 ‘조선왕조궁중음식’은 국가무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됐다. 황혜성 교수의 뒤를 이어 국가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궁중음식 기능보유자가 된 정길자 궁중병과연구원장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궁중 음식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운명이죠. 황혜성 교수님이 1971년에 궁중음식연구원을 개원하셨어요. 그때 마침 제가 한양대 가정학과를 졸업하던 해에요. 황혜성 교수님이 저와 몇몇 학생을 조교로 발탁하셨고 그렇게 궁중음식연구원의 초대 조교로 일을 시작하게 됐죠. 그 시대에는 대학 졸업이 결혼 적령기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제 언니가 그때 결혼은 안 하고 있어서 저도 결혼을 못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렇게 타이밍이 맞아 교수님 밑에서 일하게 됐답니다.” 

  -궁중병과연구원이 궁중음식연구원에서 독립하게 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저는 한국의 집에서 9년간 근무했었고, 한국관광공사가 운영했던 경주관광교육원에서도 교수로 13년간 몸담았어요. 이 시절에도 1달에 1번씩 꼭 궁중음식연구원을 방문해 황혜성 교수님과 함께 음식을 연구했죠. IMF 여파로 교육원이 문을 닫으면서 서울에 있는 궁중음식연구원으로 다시 올라오게 됐는데 황혜성 교수님이 그때 떡과 과자가 대세일 것 같다며 전통병과교육원을 개설할 테니 맡아달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1999년에 궁중음식연구원 부설 전통병과교육원이 설립됐답니다. 황혜성 교수님이 2006년에 돌아가신 이후 전통병과조리학원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했고 오늘날 궁중병과연구원에 이르게 된 거죠.” 

  -2007년 국가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로 지정됐다. 
  “황혜성 교수님의 딸인 한복려 궁중음식연구원 원장이랑 제가 똑같이 황혜성 교수님께 궁중 음식을 전수받아 전승교육사에 이름을 올렸어요. 국가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되려면 제도적으로 전수자를 거쳐 이수자가 되고 전승교육사까지 해야 해요. 전승교육사 중에 기능보유자를 선발하죠. 황혜성 교수님이 2006년 12월 14일에 돌아가신 후 뒤를 이을 사람을 선발하는 문화재청 심사가 있었어요. 보통은 1명이 대를 잇게 되니까 한복려 원장이 선정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복려 원장과 제가 모두 기능보유자로 지정이 된 거예요. 궁중 음식 종목이 너무 많으니 한복려 원장은 요리 부문, 저는 병과 부문 기능보유자로 만들어서 전수 분야를 세분화한 거죠. 제가 그래도 궁중 음식 외길을 걸었으니까 학계에서 좋게 평가해주신 것 같아요. 함께 기능보유자로 지정돼서 저도 한복려 원장도 모두 기뻐했어요.” 

  -궁중 병과란 무엇인가. 
  “궁중 병과는 후식의 개념이 있는 떡류, 과자류, 음청류로 나눌 수 있어요. 떡은 시절식의 개념도 강하고 통과의례에도 꼭 등장하는 음식이죠. 떡과 과자는 잔치에서 정말 중요한 음식이에요. 잔치는 고임(음식을 높게 쌓아 올림)을 하는데 고임의 꽃은 한과거든요. 고임은 굉장히 시간이 많이 드는데 미리 해놓으면 상하기 쉬워요. 과자는 상대적으로 보관성이 좋아 미리 고임해 놔도 괜찮죠.” 

  -궁중 음식이 두 갈래로 나눠진 것인가. 
  “음식은 좋은 식재료를 가지고 좋은 솜씨로 정성을 다해야 해요. 이 점은 궁중 음식 전체의 특징이에요. 기능 보유자 지정을 위해 궁중 음식 종목을 나누긴 했지만, 저도 그렇고 한복려 원장도 궁중 음식을 전체적으로 모두 배웠어요. 각자 따르는 이수자가 다르지만 같이 만나서 병과, 요리를 함께 공부하고 있답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면 안 되기 때문이죠.” 

  -황혜성 교수가 강조했던 가치는. 
  “음식을 하는 사람은 마음이 고와야 한다고 하셨어요. 머리 좋은 사람이 음식을 해야 한다고도 하셨죠.(웃음) 황혜성 교수님은 궁중 음식을 정성이 모인 음식이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교육자로서, 최선을 다하고 정직하고 노력하는 인간이 되라는 기본적인 가르침도 강조하셨죠. 내가 한 음식을 먹는 사람이 건강해지고 행복해한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기뻐야 해요. 예를 들면 설거지하는 게 속상하지 않아요. 먹은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설거지를 하죠. 음식에 마음을 곱게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통 장인으로서 책임감이 부담스럽지 않은지. 
  “전통을 고수해야 한다는 중압감은 있어요. 예를 들어 퓨전 떡 같은 분야는 제가 할 수 없죠. 궁중병과연구원에 퓨전 떡방을 운영하는데 제가 아니라 직원들이 강의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어떤 것을 두고 장점, 단점 어느 한쪽으로만 구분 짓기 어렵듯이 중압감 속에서 희열을 느끼기도 한답니다. ‘나는 진짜 전통을 지켜내고 있어’라는 기쁨도 존재해요.” 

  -전통 장인으로서 보람찬 순간은. 
  “국가 대표로 해외 행사에 참여하는 경우가 있어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한국 영사가 궁중 병과로 파티를 열었던 적이 있는데 반응이 좋아서 4번 정도 이어졌어요. 여유박람회에 참여하기도 했죠. 행사에 참여할 때마다 국위 선양을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굉장히 기뻤답니다.” 

  -전통 계승에 관한 견해를 듣고 싶다. 
  “저도 퓨전을 환영해요. 다만, 전통성을 두꺼운 기둥 삼아 퓨전이 가지로 뻗어나갔으면 좋겠어요. 전통 장인은 뻗는 가지가 더 잘 자랄 수 있게 두꺼운 원목을 지키겠다는 뜻이죠. 약한 가지가 흔들려 꺾이면 안 되니까 어떤 사람들은 기둥을 지켜야 하잖아요. 그게 바로 저와 한복려 원장, 이수자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전통을 고수한다고 해서 방앗간 장비를 이용하지 않고 절구에 빻거나 떡메를 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음식의 전통성은 가지고 있어야 하죠. 전통을 가지고 뻗어가야 무너지지 않을 거예요.” 

  -정길자 원장에게 전통과 궁중 음식이란? 
  “저에게 전통은 공유하고 싶은 것이에요. 아낌없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 혼자 잘하는 건 소용이 없죠. 제 주위의 많은 사람이 궁중 음식 기능을 익힐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궁중 음식이 없는 제 삶은 생각할 수가 없답니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정서적 바탕 위에 황혜성 교수님이 궁중 음식 기술을 얹어주셨죠. 전통을 떠나서는 제 존재가치가 없지 않을까 생각해요. 비싸고 특별한 음식이 아니라 누룽지, 호박죽 같은 음식을 찾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그리움으로 먹는 음식들 그게 어쩌면 전통일지도 몰라요. 음식은 우리 일생에서 제일 중요한 게 아닐까 싶어요. 입맛이 좋다는 게 행복하다는 뜻이죠. 저도 요새 입맛이 좋답니다!” 
 

(좌)떡살과 쑥개떡. (우)부꾸미와 웃지지. 사진제공 궁중병과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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