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지금 프랑스 파리에 있습니다. 통행금지와 봉쇄 조치를 겪는 ‘이시국’ 교환학생이 다른 도시와 국가를 넘나들긴 쉽지 않은 일. 오늘도 프랑스 수도권을 꿰뚫는 십수 개 메트로(métro) 노선과 기차, 트램(tramway), 에흐으에흐(RER) 등 지하철에 유유자적 몸을 싣습니다.

  서울 9호선이 개통할 때 이미 109주년을 맞은 파리 지하철은 사뭇 지저분합니다. 모두가 입 모아 똥오줌 냄새까지 진동한다고들 하니 엉망진창이라는 수식어가 딱 맞죠. 특히 열차에 오르내릴 때마다 연식을 실감하곤 합니다. 아직도 대다수가 수동문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고리를 당기거나 동그란 버튼을 눌러야만 열리는 문은 그 악명 높은 서울 1호선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죠.

  문제는 문을 여는 타이밍이 언제인지 의문스러울 때 시작했습니다. 한번은 열차가 완전히 정지할 때까지 기다렸더니 뒷사람이 답답하다는 듯이 먼저 문을 열었습니다. 뒤통수가 따가웠지만 경험을 반면교사 삼았죠. 다음에는 열차가 플랫폼에서 낮은 속도로 주행할 때 버튼을 눌렀습니다. 애먼 손짓일 뿐이었습니다. 다시금 뒤통수에 식은땀이 흐릅니다.

  어떻게 문을 여는지도 난제였습니다. 고리를 잦히고 버튼을 연타하는 일이야 어렵지 않지만 어느 정도 강세를 요하는지는 고민이 필요했습니다. 대형 엔터키 쿠션처럼 쾅 눌러야 할까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아이폰 홈버튼을 상상하는 정도면 충분할까요. 힘을 과하게 들여 기자가 오히려 놀란 적도, 적은 힘 때문에 문이 한 번에 열리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인근 역 이름을 외울 만큼 지하철에 몸을 싣고 나서야 나름대로 해답을 도출했습니다. 열차가 ‘피슝’ 소리를 내면 문이 열리고 버튼은 ‘꼬옥’ 정도로 누르면 됩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사회 구성원에게는 당연한 정답을 위해 이방인은 시행착오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소소하게는 지하철 타는 법부터 크게는 사회 시스템 전반까지 당연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운 고국에도 이방인이 있습니다. 아주 정말 굉장히 많습니다. 국적이 달라야만 이방인일까요. 사회가 규정한 정상성에서 벗어난 이에게는 당연함의 문턱이 높습니다. 장애인 이동권 보장 시위에 빗발치는 항의, 동아제약 성차별 면접 공론화, 베트남 유학생과 농촌총각 간 만남을 주선한 문경시 사업, 모두 3개월 새 일어났습니다. 기자가 한국을 떠나 이방인의 시선을 경험한 3개월 말이죠.

  이달 초 종영한 〈빈센조〉에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약자의 느낌, 그거 지난 이틀 동안 아주 잘 느껴봤습니다.” 이에 서민 변호사는 “진짜 약자들은 그 무기력과 화를 이틀이 아니라 평생 느끼고 산다”고 답하죠. 기자는 3개월간 느낀 바를 자양분 삼아 평생을 살고자 합니다. 당신은 누구의 당연함에 눈높이를 맞추시겠습니까?

 

전영주 뉴미디어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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