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에서, 대중교통을 타다가, 타인의 이야기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대화는 유독 투자에 대한 것이다. 투자 정보를 공유하고 투자 기법을 전수하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영끌 투자’라는 말을 들은 바 있다. 원래의 의미가 무엇이었건 모든 일상, 대화, 그리고 생각을 투자 차익에 집중하고 있는 현상을 표현하는 데 ‘영혼까지 끌어모은 투자’라는 말 만큼 적절한 것은 없는 듯 하다.

  영끌투자는 적절한 선택일까? 애석하게도 타당하다. 자산에는 내재가치가 있다고 믿어져왔다. 이 수준을 넘어 시장가치가 상승하면 그것은 비이성적 과열에 의한 것이니 조만간 거품이 꺼지고 투자자도 손실을 입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관념은 개인의 이익추구가 전체 사회의 발전과 양립가능하도록 경제행위에 대한 인식기준과 규범을 구성하려는 지적 노력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최근 정부관료에서부터 투자전문가에 이르기까지 투자 붐을 고취하는 수준을 넘어 애초 내재가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으로까지 나갔다. 한편 맞는 말이다. 내재가치는 주관적 구성물일 뿐이며 물질적 근거를 갖지 않는다. 나아가 현재 상황을 보면 유효한 경제 규범이라 할만한 것을 찾기도 어렵다. 금리는 낮은데 투자는 멈췄다. 4차산업혁명이 말해지지만 총요소 생산성은 바닥이고 가계부채는 급증했지만 소비성향은 하락했다. 그리고 최근 이 모든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주가가 급등했다. 하늘 아래 투기 아닌 것이 없으며 내재가치를 운운하는 것이 무의미해 보인다. 그래서 영끌투자는 타당하다. 다만 그것은 한국의 경제규범이 해체된 상황이기에 그렇다. 

  현실적 삶을 보더라도 영끌투자는 합리적 선택이다. 팬데믹 직전까지 한국경제는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이 안정성은 성장률은 둔화되고, 신규기업의 수는 하락하고, 실업자의 취업자로의 이행확률이 매우 낮은 상태의 안정성이다. 경제활력의 신호가 중단됐다는 의미에서의 하향 안정화였으며 이는 다른 국가와 비교해도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보통의 사람이 경험하게 되는 삶의 상태로 번역하자면 다음 같을 것이다. 어떻게든 취업을 하면 소득을 벌어들일 수는 있으나 과거부터 이어져온 인식에 따를 때 표준적인 삶을 살기에는 부족하다. 다른 것은 다 불확실해도 이 결여 상태가 앞으로 계속될 것이라 점은 분명하다. 다만 어떤 이유든 한번 실업상태로 떨어질 경우, 안정적으로 실업 상태에 남게 될 것이다. 이제 가성비를 따져볼 만 하다. 모든 것을 쏟아붓고 모든 자유를 포기해도 보통 직장인의 삶을 꿈꿀 수 없다면, 투자로 손실을 볼 가능성을 고려터라도 영끌투자의 가성비는 충분히 높다. 이렇게 한국 사회에서 영끌투자가 타당한 것인지를 묻는 것은 우문이다. 그것은 이미 합리적 선택이다. 다만 남은 질문은 ‘영혼과 일상까지를 비용으로 지불하고도 영끌투자를 가성비 높게 만드는 이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라는 것뿐이다.  

구본우 강사
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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