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은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일정한 생활 모습이나 행동을 뜻하는 말입니다. '전통'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렸을 때, 어떤 생각이 드나요? 낯설고 어렴풋한 단어로 느껴지진 않나요? 전통에 대한 막연함을 생활면이 바꿔 드립니다. 이번주는 우리의 삶을 새겨온 한지를 만났습니다. 세계로 향해가는 한지의 발걸음에 맞춰 함께 떠나볼까요. 서민희 기자 tjalsgml0928@cauon.net

문화재 보수용으로 사용되는 한지. 주원료는 국산닥(백닥) 이며 목판건조방식을 이용했다. 사진출처 한지문화산업센터

견고한 짜임새로
천년을 살아 숨쉬는 한지 
우리의 일상과 호흡하다


‘견오백지천년(絹五百紙千年)’이라는 말이 있다. 비단은 오백년을 가고 한지는 천년을 간다는 의미다. 이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유구한 세월을 간직한 한지 유물들이 실제로 전해져오며 역사성을 증명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지의 시간은 흐른다. 역사를 품고 미래로 흘러가는 타임캡슐, 천년의 한지. 그 시간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천년을 내다보고 지은 종이 
  인류는 종이를 매개로 문명을 꽃피우고 번영시켜 왔다. 종이는 105년경 중국에서 채륜이라는 인물에 의해 발명됐고 이후 한국으로 전파됐다고 추정된다. 이선경 (사)한지개발원 이사는 한지 전래 과정을 소개했다. “중국에서 채륜이 종이를 발명했고 넝마를 원료로 사용했다고 전해져요. 한반도에는 대략 3~4세기에 종이 기술이 전파됐고 닥나무 껍질로 만들어 닥종이라고도 불린답니다.”

  한국은 중국의 제지술을 차용하면서 독자적인 제법을 점차 발전시켜나갔다. 7~8세기 무렵부터 한국의 독자적인 종이 제법이 갖춰졌다. 삶은 닥나무 껍질을 방망이로 두드리는 고해(叩解) 과정과 종이를 두드려 표면을 평활하게 하는 도침(搗砧) 과정은 우리나라에서만 등장하는 기법이다. 중국은 섬유를 잘게 자르기 때문에 도침 과정 대신 돌가루나 전분을 발라 공극을 메꿨다. 도침을 통해 한지는 조직이 치밀해져 강도가 높아지고 광택이 난다. 정은희 ‘정은희 한지갤러리’ 대표는 도침이 한지의 내구성을 강화한다고 말했다. “닥나무의 인피섬유로 한지를 만들어요. 닥나무 섬유질의 길이가 길기 때문에 일반 종이보다 튼튼하죠. 특히 한지의 제작 단계에서 도침 과정이 조직을 치밀하게 만든답니다.”
 
  송나라인 손목이 지은 『계림지(鷄林志)』에는 한지를 설명한 백추지(白.紙)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백추지는 다듬이로 다듬어 부드럽게 만든 흰 빛깔의 종이라는 뜻으로 한지의 특성을 적절히 설명한다. 이선경 이사는 한지가 중국에서 우수한 품질을 인정받았다고 언급했다. “고려의 종이는 비단보다 희고 윤기가 나서 중국의 황제나 궁궐에서 즐겨 찾는 종이였어요. 견오백지천년이라는 말이 바로 여기서 유래된답니다.” 

  부드러움 속 강한 힘 
  닥나무를 원료로 사용한 한지는 보존성이 탁월하다. 또한 한지는 닥풀, 잿물을 넣기 때문에 공기에 노출돼도 쉽게 산화하지 않는다. 1966년 10월, 경주 불국사 3층석탑(석가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약 1300년의 세월을 간직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됐다. 이 유물은 한지 두루마리에 인쇄된 불경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다. 이 사실은 한지의 강인한 내구성을 증명한다.
 
  한지는 이런 특성을 인정받아 전 세계적으로 문화재 복원에 활용된다. 이탈리아에서 한지는 문화재 보존·복원 용지로 인증받아 사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새의 비행에 관한 코덱스’가 한지로 복원돼 화제를 모았다. 일본 화지를 공급받던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은 화지에서 일부 화학성분이 발견되자 이를 대체할 종이를 물색했다. 2016년부터 전통 한지가 루브르 박물관에 공급되기 시작했고 이후 문화재 복원에 쓰였다. 유럽에서 시작된 한지 열풍은 미국으로까지 넘어갔다. 하버드대 박물관에서도 복원처리에 한지를 활용한다. 이선경 이사는 일본의 화지를 통해 동양의 종이 문화를 접한 유럽이 한지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했다. “2011년 로마 한지 문화제 등을 통해 한지 문화가 세계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어요. 2019년에 이탈리아 문화재 복원 현장을 방문했을 당시 살펴본 복원용 종이의 종류는 매우 다양했죠. 한지도 복원용 종이에 포함돼 활용되는 길이 열리는 중이랍니다.”
  
  최근에서야 한지가 세계적으로 전파되는 듯 보이지만 한지 수출은 깊은 역사를 자랑한다. 이선경 이사는 한국이 종이 기술 전파의 핵심에 있었다고 말했다. “신라 시대 담징 스님이 일본에 종이 기술을 전수했어요. 고구려의 후손 고선지 장군이 탈레스 전투를 거치며 실크로드를 따라 유럽에 종이를 전파하기도 했죠.” 

  한지와 함께 삶을 
  종이의 역할에 머물던 한지가 생활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그 중심에는 ‘한지사’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한지사는 한지를 얇게 자르고 꼬아 만든 한지 섬유를 면, 실크, 울 등 다른 섬유와 섞어 직조한 직물이다. 국내외에서 활발히 펼쳐지고 있는 한지 패션쇼는 한지의 다채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서양에서 최초로 종이를 제작한 지역으로 알려진 이탈리아 파브리아노에서 2019년에 한지 패션쇼가 진행됐다. 한지와 한지 직물로 제작된 한지 의상 50여벌이 파브노의 밤을 수놓아 4000여명의 관람객을 매료시켰다. 전주와 원주 등 국내 한지 축제에서도 한지 패션쇼가 꾸준히 열리는 중이다. 정은희 대표는 한지의 물성이 종이보다 섬유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한지의 섬유 특성에 따라 수공예품 제작용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돼왔어요. 현대에 들어서 한지는 패션 산업과 실내장식 분야에 이르기까지 사용 범위가 확장되고 있죠.”
  
  주거공간에서도 한지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은 이어진다. 한지는 가볍고 다루기 쉬울 뿐만 아니라 여러 겹을 겹쳐 사용하면 나무나 시멘트 못지않게 단단한 소재가 된다. 순수 자연 소재를 원료로 해 친환경적이라는 점도 장점으로 꼽힌다. 또한 공기 중의 유해한 성분을 흡착한다고 알려진 한지는 고급 건축 자재로 주목받고 있다. 전주시는 친환경 한지 벽지와 장판을 개발해 건축자재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완주군 혁신도시에 조성된 아파트에서는 한지 벽지를 대량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는 한지의 새삼스러운 재발견이 아니다. 예로부터 한지는 우리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정은희 대표는 장판, 벽, 창호, 천장 등 한국 전통 가옥 곳곳에 한지가 사용됐다고 언급했다. “목적에 맞게 장판지로 사용되는 한지는 동전 두께 정도로 제작됐어요. 창호에 붙인 한지는 통풍을 원활하게 하고 실내의 습도를 적절히 조절했죠. 문 손잡이 부분은 쉽게 구멍이 생길 것을 대비해 이중으로 한지를 붙였답니다.” 

  한지에 그려질 미래 
  그릇, 마스크 등 여러 분야에서 한지를 접목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더불어 전통 한지를 이용해 대용량 종이 배터리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기도 했다. 정은희 대표는 한지의 잠재력을 발굴하고 적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지의 잠재력은 무한하다는 생각을 항상 해요. 이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한지 연구도 중요하지만 한지에 관한 관심을 높이고 한지를 보존하려는 인식이 확산해야 하죠.” 이선경 이사는 한지도 결국 사람이 만든다는 사실을 환기하며 장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국가나 공공기관에서 한지 장인을 어떻게 육성하는지가 관건이에요. 모든 일에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죠. 전통 한지의 산업화 및 보존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해요.” 

  윤성원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전통생활문화산업팀 주임은 한지의 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다양한 지원사업을 통해 수요를 창출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국가적 차원의 지원사업만으로는 한계가 존재해요. 소비와 생산을 원활히 순환시켜 한지 산업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답니다.”

  미국은 4년제 주립대학 교양 커리큘럼에 ‘종이 개론’ 수업을 개설해 운영하고 있다. 이선경 이사는 한국도 한지 교육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에 실린 ‘한지 공장을 다녀와서’라는 내용을 통해 한지를 학습하고 있어요. 중·고등학교를 비롯해 대학교육에서도 한지 제조기술을 배우고 익히게 교육정책을 개편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재 한지 내용은 초등학교 저학년 교과서에 수록돼있어 초등학생 중심의 단순한 색지 공예 체험 위주로 한지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정은희 대표는 한지 체험 교육 커리큘럼이 대상과 연령에 따라 활발히 이뤄지기를 기대했다. “색지 공예, 줌치 공예 등 한지를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으로 난이도를 조절해 연령에 맞는 다채로운 한지 체험이 이루어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지는 현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유네스코는 문화의 다양성과 정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윤성원 주임은 한지가 유네스코에 등재되기 위해서 한지의 우수성을 강조하기보다 한지가 수천년의 세월을 함께하며 우리나라의 생활과 문화 등에 많은 영향을 끼친 유산이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전국 각지의 한지장인 및 관련 단체와의 협업을 통해 한지를 유네스코에 등재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해요.”
 

한지를 사용한 조명 오브제
한지를 사용한 조명 오브제. 사진제공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대승한지마을에서 전통 한지를 제조하는 모습. 사진제공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줌치 가방. 줌치는 여러 장의 한지를 물 속에서 주물러 제조된다. 사진제공 엠브이코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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