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이 단어를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보통 돈을 밝히기는커녕 붓을 들고 피폐하게 작품에 몰두하고 있는 가난한 예술가의 이미지가 떠오르기 십상인데요. 하지만 예술만큼 아카데미즘에 맞닿아있으면서 자본과 직결되는 분야가 또 없습니다. 따라서 예술이 속한 시장의 힘을 무시할 수가 없죠. 이번 문화부에서는 각 예술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기제를 파악하고, 시장 속 각 주체는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담아보려고 합니다. 이번주 저희가 알아볼 곳은 번역시장인데요. 과연 번역시장에서는 어떤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을까요? 김유진 기자 kyj8976@cauon.net

번역, 예술의 범주로 봐야해 
번역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NMT

상상력·창의력은 인간 번역가의 경쟁력 
AI, 인간 파트너 될 수 있을까

AI 전문가, “결국 AI가 상당 부분 대체해” 
현직 번역가, “예술은 AI번역의 영역이 아냐”

‘Frozen(얼어붙은)’을 ‘겨울왕국’으로, ‘Night at the museum(박물관의 밤)’을 ‘박물관이 살아있다’로 번역가는 이렇게 단어를 재창조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꽤 오래전부터 번역가는 서로 다른 문화권을 연결하며 인류 문명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지켜온 그들의 입지가 최근 흔들리고 있다. AI 기술이 번역시장까지 영토를 확장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번역가는 AI 기술 발달로 인해 미래에 사라질 직업 1위로 꼽힌다. 과연 번역가는 역사 속에나 존재했던 직업으로 남게 될까, 아니면 계속해서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을까. 

  NMT의 등장, AI 번역의 도약 
  번역가는 단순히 텍스트를 다른 언어로 치환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맥까지 고려해 필자가 뜻하는 바를 전달하는 직업이다. 따라서 같은 글일지라도 10명이 번역하면 10개의 번역이 나올 정도로 번역가에 따라 번역의 양상은 다양하다. 이처럼 번역은 예술의 범주로 여겨지는 매우 섬세한 작업이다.  

  번역 작업에 기계를 사용한 시도는 1950년대부터 시작됐다. 규칙 기반 모델에 바탕을 둔 초창기 기계 번역에서 확률 원리를 활용한 통계적 기계 번역(Sta–tistical Machine Translation, SMT)까지 발전을 이뤄왔다. 그런데 최근에 화두가 되는 ‘신경망 기계 번역(Neural Machine Translation, NMT)’은 차원이 다른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다. 

  신경망 기계 번역은 AI 기술을 활용한 번역 기법으로 인공신경망을 이용한 딥러닝 모델에 기반한다. 인공신경망을 다층적으로 구성해 컴퓨터도 마치 사람처럼 생각하고 학습할 수 있다. 이로써 기계를 통해서도 짧은 단어·구뿐만 아니라 문장 단위의 번역이 가능하게 됐다. 번역의 질을 높이기 위해 현재에도 더 많은 데이터와 정교한 딥러닝 모델을 활용한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이에 발맞춰 신경망 기계 번역의 품질은 나날이 향상하고 있다. 구글을 비롯한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애플, IBM 등의 기업이 적극적으로 AI 번역 기술 개발에 참여해 그 가능성을 넓혀가는 추세다.  

  현 AI 번역 기술은 번역시장 자체의 확대와 세분화에 기여하고 있다. AI 번역의 질이 향상되면서 초벌 번역에 이를 활용하는 ‘핵심내용 중심 요약’, ‘포스트 에디팅(post editing)’ 등의 서비스가 등장해 인간 번역가의 업무 영역이 확장됐다. 특히 AI가 진행한 초벌 번역을 인간 번역가가 검수하는 포스트 에디팅 업무는 기존 인간 번역가가 모두 처리할 수 없었던 막대한 번역 수요를 받아들여 번역시장 확대에 이바지하는 중이다. 또한 번역 대상의 갈래에 따라 인간 번역이 필수인 ‘하이엔드(high-end)시장’, 비교적 중요도가 낮아 AI 번역을 적극 사용하는 ‘로우엔드(low-end)시장’ 그리고 작업의 효율을 높이는 보조 번역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중간 중요도 시장’으로 세분화가 이뤄지고 있다.  

  굴러들어온 AI가 박힌 번역가 뺀다?  
  이대로라면 AI가 인간 번역가를 대신하는 날이 찾아 오진 않을까. 전문 번역가에 의하면 AI 번역 품질이 현재 초벌 번역이 가능한 정도이며 미래에 AI 번역이 인간 번역을 완벽히 대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진실희 교수(국제대학원 전문통·번역학과)는 AI 번역의 수준이 아직 부족해 입체적인 인간 언어의 기능을 온전히 전달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언어에는 정보 전달 기능 외에도 어감과 관련된 ‘표현적 기능’, 설득적 성격을 띄는 ‘작용적 기능’이 있어요. 또 사회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죠. AI 번역은 정보 전달 차원에서도 아직 불완전하지만, 여타 언어 기능 관련 범주에서 많은 오류를 보이고 있어 섬세한 역량을 갖추기엔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증명하듯 기계 번역의 오류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구글·네이버·다음 번역기에서 한국어 ‘김치’와 영어 ‘kimchi’가 올바른 표기인 중국어 ‘辛奇(신치)’ 대신 ‘泡菜(파오차이)’로 번역돼 논란이 있었다. 이는 사회적 현안을 반영하지 못한 해석으로 AI 번역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얼굴 표정이나 시선 같은 비언어 정보를 많이 사용하는 문화권의 언어일수록 AI 번역의 정확도는 더욱 낮아진다. 홍민표 교수(계명대 일반대학원 통번역학과)는 한국 사회를 예로 들어 문화적 맥락에 따른 AI 번역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한국에서는 직접 발화보다는 간접 발화를 통한 의사소통이 많이 이뤄져요. 예를 들어 부모님이 밤늦게 들어온 자녀에게 ‘지금 몇 시니?’라고 한 말이나 ‘소주 한잔하자.’ 같이 한국 특유의 돌려 말하는 문화가 반영된 문장을 기계가 그 의미를 살려 번역하긴 쉽지 않죠.” 

  서해원 한국번역기술원 팀장 또한 AI 번역이 인간 을 대체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뢰인의 의도에 맞게 약 7~80%에 달하는 만족도를 제공한다고 해서 AI 번역을 믿고 쓸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기업이 단 1%라도 더 뛰어난 표현을 활용할 수 있는 인간 번역가에게 가치 투자를 하는 건 당연하다고 봅니다. 작문 센스 등의 역량은 AI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특히 문학과 같은 예술 분야 번역의 경우 앞으로도 AI가 침범할 수 없는 고유의 영역이 될 겁니다.”  

  일각에서는 AI 번역이 인간 번역과 상생의 관계에 놓일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완성도 및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AI 번역의 한계를 인간이 보완하고 대량 작업이 어려운 인간 번역가의 한계를 AI 번역이 서로 보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홍민표 교수는 인간 번역가가 AI를 경쟁 상대로 볼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으로 완성도 높은 문장을 만드는 데에 집중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위기는 기회가 될 수 있을까? 
  반면 김영빈 교수(AI대학원)는 머지않아 AI도 인간 번역에 버금가는 품질의 결과물을 보일 것이기에 인간 번역가의 입지가 줄어들 거라고 예측했다. “일상의 농담을 재구성해 사진을 보여주면 그에 적합한 농담을 생성해내는 기능이 탑재된 GPT-3라는 언어 모델이 있어요. 이런 사례를 보면 사회적 관습이나 문화에 따른 표현 데이터가 충분히 존재한다면 AI도 상황 맥락에 따른 번역이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더불어 김영빈 교수는 현재와 같은 속도로 AI 번역 기술이 발전해 나간다면 번역시장의 형태가 ‘기계 번역+포스트 에디터’의 형태로 나아갈 것으로 전망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결국 포스트 에디터의 역할도 줄어들 거라고 생각해요. 그들의 결과물이 또 하나의 학습 데이터가 돼서 AI 번역의 성능을 높일 거거든요. 기계 번역이 포스트 에디터의 역할을 완전히 대체하진 못하더라도 상당한 부분을 대체하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기술의 발달로 AI 번역이 인간 번역 업무에 기여하는 정도는 계속해서 확장될 것이다. 이에  뛰어난 창의력을 갖춘 번역가만이 시장에 남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들에게 AI 번역은 업무 영역 확장의 계기이자, 서로를 돕는 최적의 파트너다. 이로써 번역가는 양질의 번역을 위해 고민하는 데에 더 치중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외국인들에게 생소한 ‘짜파구리(짜파게티와 너구리를 섞은 라면)’를 라면과 우동을 합성한 ‘Ramdong(람동)’으로 번역한 사례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와 같은 사례가 놀랍지 않을 만큼 우수한 번역이 일상이 되는 날을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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