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작품을 볼 때마다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막막하신가요? 난해하게 본 작품이 대외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거나 재밌게 본 작품이 저평가받는 황당한 경우를 한번쯤은 경험했을 텐데요. 예술작품을 마주할 때마다 시야가 흐릿해지는 분들을 위해 문화부가 작품을 보다 멀리 내다볼 수 있도록 맞춤 안경을 만들어드립니다. 이번주는 안경의 도수를 구조주의로 맞춰 봤습니다. 함께 안경을 쓰고 작품을 보러 가봅시다! 김유진 기자 kyj8976@cauon.net 

※본 기사는 김휘택 교수(프랑스어문학전공), 조혜정 교수(예술대학원 문화콘텐츠전공), 심영섭 영화평론가를 대상으로 개별적으로 진행한 영화 <기생충> 구조주의 비평 자문 및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기자가 작성한 비평문입니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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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다음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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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똑같다! 둘이 냄새가 똑같아! 제시카 선생님한테서도 비슷한 냄새가 나는데.” 

“그게 아니라 반지하 냄새야. 이 집을 떠나야 냄새가 없어진다고.” 

“굳이 할 거면 자기 앞자리에서 그냥 하지 왜 선을 넘어오는 걸까?” 

“밑에 가야 돼. 내려가야 돼. 저 사람들이 아니라, 더 밑에.”

영화 <기생충>은 선 넘는 자들의 비극이다. 칼부림으로 피에 젖은 결말은 관객에게 충격을 안겨줬다. 찢어진 상처로 가득한 근세의 얼굴은 기괴하기까지 하다. 해당 영화는 선, 즉 경계 너머로 넘어가고자 하는 욕구와 그 경계를 굳건히 지키려는 욕구 간 충돌을 그려내고 있다. 영화가 비극으로 치닫기까지 무수히 넘나든 ‘선’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찡그린 코, 집어 든 칼  
  ‘선’은 1차적 의미로 ‘그어 놓은 금이나 줄’이라는 뜻이 있다. 또한 관용구 ‘선을 넘다’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한계나 한도를 넘다’이다. 이를 통해 해당 관용구 속 선의 의미는 ‘어떤 한계나 한도’임을 유추할 수 있다. 한계·한도는 개인마다 다르기에 이는 각자의 경험을 담아내는 2차적 의미에 해당한다.  

  기택의 가족에게 선이 지니는 2차적 의미 중 하나는 바로 ‘냄새’다. 이는 영화 중반 동익의 아들, 다송에 의해 처음으로 언급된다. ‘공통된 냄새가 난다’는 순수한 지적을 다송에게 받은 이후로 기택의 가족은 냄새와 관련된 행동에 점차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다송의 지적으로 인해 냄새는 기택 가족에게 또 다른 기표가 돼 ‘모멸감·모욕감·수치심·자격지심’이라는 새로운 2차적 의미를 갖게 된 셈이다. 반면 그들의 감정에 공감할 수 없는 동익의 가족에게 냄새는 그저 ‘불쾌감·경멸감’을 의미할 뿐이다.  

  “암튼 그 양반, 전반적으로 말이나 행동이 선을 넘을 듯 말 듯 하면서도 결국엔 절대 선을 안 넘거든. 그건 좋아. 인정. 근데 냄새가 선을 넘지. 냄새가.” 영화 중반 한밤중 동익이 소파에서 아내인 연교에게 건넨 대사다. 해당 대화는 철저히 냄새의 근원인 기택을 경멸의 대상으로 두고 있다. 이를 들은 그의 가족, 특히 기택에게 냄새라는 기표가 상징하는 모욕감·모멸감 등의 2차적 의미는 점점 극으로 치닫는다. 

  해당 감정을 고조시킨 데에는 선의 또 다른 2차적 의미인 ‘권위’가 작용했다. 권위의 2차적 의미는 동익·기택 가족에게 각각 뜻하는 바가 다르다. 기택 가족에게 권위는 ‘기득권의 갑질’이며 동익 가족에게는 ‘당연하기에 어겨지면 불쾌한 권리’다. 소파에서 이뤄진 동익과 연교의 대화 이후 기택과 충숙에 대한 동익 가족의 갑질이 영화상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묘사된다. 장을 보는 동안 운전기사인 기택을 짐꾼으로 두고 다송의 생일파티 준비에 그를 동원한다. 그 과정에서 동익은 근무의 연장임을 언급하며 기택에게 부가적인 노동을 강요한다. 가정부 충숙에게도 파티 준비 시 테이블 배치를 혼자 하도록 시키는 등 필요 이상의 요구를 당연시 한다. 이처럼 영화 흐름 속 동익과 그의 가족은 ‘냄새’와 ‘권위’라는 기택 가족의 두 가지 선을 모두 넘나드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기택이 동익을 살해한 결정적인 동기는 기택의 ‘냄새’ 관련 2차적 의미의 선에 있다. 영화 후반부, 연교는 정작 자신의 맨발을 조수석 위에 올려놓고 기택으로부터 냄새가 나 불쾌하다는 듯 창문을 연다. 이때 기택의 감정은 한계에 다다른다. 근세의 몸 아래 떨어진 차 키를 주우며 동익이 코를 틀어막는 것을 본 기택의 감정은 결국 극단에 치닫고 이는 동익을 칼로 찌르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높은 곳을 향하다 더 깊은 나락으로 
  넓게 보면 선은 동익의 가족과 기택의 가족 간 ‘계급적 경계’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 선은 고정되거나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냄새처럼 가변적 혹은 맥락적으로 언제든 넘을 수 있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기생충>에서는 이 선을 공간의 개념으로 구분해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동익의 집 지상과 지하 공간을 완전히 분리하고, 동익의 집에서 기택의 집으로 가는 길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내리막길로 연출하는 등 상대적인 위치의 개념으로 묘사했다.  

  영화 초반부에서 선을 넘어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기택 가족의 욕망을 엿볼 수 있다. 이 욕망은 기우를 통해 가장 잘 드러난다. 와이파이를 잡기 위해 반지하 집에서 가장 높은 곳인 화장실 변기 위를 찾고 동익의 집 2층으로 올라가 그에게 신분 상승의 기회와 같은 다혜의 방에서 스킨십을 하기도 한다. 기우가 처음 동익의 집에 방문하는 장면을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구도로 연출한 것도 주목해볼 만하다. 또 가정부인 충숙이 자리하는 곳은 1층인데 반해 동익과 그의 가족이 주로 생활하는 장소는 집의 꼭대기 층인 2층이다. 특히 근세는 지상 공간에 있는 인물들이 채 인식하지도 못하는 선 아래의 지하 공간에 자리 잡아 철저히 소외된 계층으로 묘사된다.  

  영화 중반까지 영화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다. 가난한 아랫동네에서부터 출발해 상대적으로 위에 위치한 동익네 집, 그 안에서도 가장 높은 층인 2층에서 수업을 진행하는 기우와 기정의 모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소외된 지하 공간의 문광과 근세 역시 지상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을 내비친다. 기택의 가족이 거짓으로 동익의 집에서 일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문광과 근세는 이를 무기로 지상으로 올라와 기택의 가족을 억압하고 자유를 누린다. 

  하지만 영화 후반에 들어 계급적 경계를 뜻하는 선은 보다 뚜렷해져 인물들에게 절망을 안겨준다. 이 영화가 단순한 일가족 사기단의 이야기에서 비극으로 전복되는 시발점이 된 것은 근세다. 기택 가족이 그들의 생활에 만족을 느낄 무렵 근세의 등장으로 그간의 안정감은 사라진 채 위태함만이 남는다. 기택 가족이 이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문광은 뇌진탕에 걸려 죽게 된다. 근세는 지하에서의 생활을 이어나가고자 했으나 충숙에 의한 문광의 죽음을 계기로 지상에 걸어 올라와 충숙의 딸인 기정을 칼로 찌른다.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도한 지상으로의 발걸음은 충숙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며 실패한다. 선 너머로 올라가려던 기택, 기우, 기정, 충숙, 문광, 근세 모두 이전보다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보다 굳건해져 다신 넘지 못할 선이 그어진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선은 넘어설 수 없는 선, 계급적 경계다. 높은 곳을 바라보던 인물들은 이 선에 처참히 짓밟힌다. 비참한 현실에 대한 분노의 표출로 기택은 기득권의 중심인 동익을 해치고 스스로 지하에 몸을 숨긴다.  

  현실은 영화보다도 가혹하다. 돈과 능력은 덧셈이 아닌 곱하기의 문제다. 처음의 값이 클수록 더 부풀려질 수 있는 것이 돈이고 현실이다. 시작하는 값이 0이면 올라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굳건히 자리 잡은 선 아래 ‘0의 계층’에게 <기생충> 속 기택 가족의 모습은 그들의 현실 그 자체일 것이다. 곱셈이 아닌 덧셈의 사회로 나아갈 수는 없을까. 우리의 그물망을 소외된 자들의 위치에 맞추려는 노력만이 또 다른 기택의 비극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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