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 입학 전 어느 날, 아버지께서 어린 강아지를 집에 데려오셨다. 얼룩무늬 잡종견이었는데, 방에 내려놓자 까만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부들부들 떨던 모습이 기억난다. 같이 자도 된다는 허락 하에, 방 윗목에 담요를 깔아 주었는데, 그날 나는 ‘애니’(강아지 이름)가 밤새 끙끙대는 통에 한잠도 자지 못했다. 나중에 그 어린 애가 용변을 참느라 그랬다는 것을 알고 나니 참 기특해 보였다. 그 후 집 안에서 자란 몇 달 동안 애니는 한 번도 방에 용변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학교에 갔다 돌아올 때 항상 애니의 반김을 받았다. 당시 단독주택에서는 반려동물을 풀어서 키웠고 문도 열린 채여서 대부분 자유롭게 나다니다가 저녁 무렵에나 돌아왔다. 하지만 애니는 항상 나의 귀가 시간에 맞춰 집에 와 있던 것이다. 그러던 초등학교 4학년 어느 날 애니가 문 앞에 없었고, 저녁이 되어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서야 할머니가 애니를 기다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개와 정이 들면 안 되기 때문’에 애니를 개장수에게 팔았다는 것이었다. 이 무슨 날벼락인가? 내가 애니를 다시 데려오자고 울며불며 애원을 해도 할머니는 꿈쩍도 안 하셨다. 게다가 그 개장수의 연락처도 어디에 사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거의 할머니 손에 컸기 때문에 할머니를 ‘진짜’ 사랑했지만 이때는 아니었다. 

  내 딸은 전화기에 “아빠 개 사주셈”이라고 쓰고 다닐 만큼 반려동물을 키우고 싶어 했지만, 나의 ‘거절’은 단호했다. 설명이 안 되지만 헤어짐의 상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거나, 내 상처에 대한 일종의 보복을 딸에게 가했던 것일 수 있다. 그러다 딸이 20대 중반이 된 어느 날 2달도 채 안 된 어린 고양이를 데려왔다. 다 큰 딸에게 뭐라 할 수도 없었기에 무관심으로 내 의견을 표명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난 새벽 살금살금 내 옆에 온 작은 애를 안아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나는 처음으로 소위 ‘골골송’을 들었는데, 그땐 이 애가 몸이 약한가보다고 생각했고, ‘너를 잘 키워줄게’하고 속말을 하는 순간 갑자기 눈물을 쏟았던 것이다. 이제 라온(고양이)은 잘 커서 4살이고 나는 좋은 집사가 되려고 노력한다.  

  동물이기는 하지만 라온을 보면서 사랑에 대하여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많은 현대 사상가들은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사랑은 상대방을 대상화하고, 결핍의 충족을 위한 욕망이며 또 나르시즘의 발로라는 것이다. 나는 이들의 논리를 아주 잘 이해한다. 하지만 사랑은, 의지와는 관계없이 상대방이 좋고, 다 주어도 후회가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허무와 지독한 고독으로부터 구원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 우리의 가치를 무한히 확장시켜주는 것이다. 사랑이 어렵고 힘들고 때로는 귀찮을 수 있다. 허나 분명한 것은 사람에게든지 동물이나 자연에게든지 사랑은 우리를 행복하고 아름답게 한다. 특히 상대가 나보다 작고 연약하고 도움을 필요로 할 때는 더 그런 것 같다.

서명수 교수
프랑스어문학전공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