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문화사가 요한 호이징가(1892-1945)는 ‘중세의 가을’이라는 탁월한 저서에서 “세계가 지금보다 5세기 가량 더 젊었을 때, 삶에 일어난 많은 일들은 지금과 현저히 다른 모습과 윤곽을 띠고 있었다. 불행에서 행복까지의 거리도 훨씬 멀게 여겨졌고, 모든 경험은 기쁨과 고통이 어린 아이의 정신 속에서 갖는 것 같은 그런 즉각적이고도 절대적인 강도를 띠었다”라고 첫 부분에 적고 있다. 호이징가가 주목한 것은 중세 말기의 ‘삶의 쓰라림이 느껴지는 참으로 악한 세계’이다.

그렇지만 ‘가을’ 이전의 중세는 전혀 다른 면도 지니고 있었다. 중세는 그렇게 극단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극단의 시대’는 건강과 질병, 부와 가난, 도시와 시골, 빛과 암흑, 침묵과 소요 등 정치, 경제, 공간, 일상문화의 모든 곳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차용구 교수(문과대 사학과)가 번역한 페르디난트 자입트의 ‘중세의 빛과 그림자’(까치, 2000)는 중세의 일부가 아닌 전체를 경험할 수 있는 머나먼 과거로의 여행을 제공한다. 이 책은 저자가 오랫동안 독일 보훔의 루르 대학에서 한 중세사 강의를 토대로 쓴 중세사 입문서이다. 1000년의 역사! 저자에게 ‘중세’ 연구는 한정된 역사, 즉 고대와 근대와 다르게 시작과 끝이 명확하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갖는다. 중세는 그 역사의 길이만큼이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곤 했다. 그래서일까. 왠지 중세는 항상 모호하고 신비롭기만 하다.

모두 6백여쪽에 이르는 이 책의 구성은 모두 일곱 장으로 되어 있다. 제1장에서는 ‘황제권’을 ‘중세의 뿌리’로 파악하면서 중세의 정치발전에 있어 사건과 인물을 다루고 있다. 제2장은 주인과 노예의 이분법적 구분과 달리 귀족, 성직자, 농민 계층의 삼분하는 중세봉건사회의 사회질서를, 제3장에서는 11세기 이후의 급격한 변화와 발전을 이루는 시기를 중심으로 중세의 사회와 경제 생활을 서술하고 있다. 제4장은 중세의 종교와 정신 생활을 서술하고, 제5장 ‘권력과 공간’에서는 국가 개념의 형성과 더불어 민족국가들간의 분쟁이 가속화되는 것을 다루고 있다. 마지막으로 제7장에서는 중세인들의 일상 생활, 민중 신앙, 구전 문학들을 다루면서, 중세의 대성당과 성들의 화려함에 가려져 중세사 연구의 사각 지대에 놓여있던 여성, 걸인, 마녀들에 대한 이야기를 적고 있다.

얼핏 보면 그야말로 평이한 개론서에 불과하겠거니 생각하기 쉬우나, ‘그림과 함께 떠나는 중세 여행’이라는 책의 부제에서 드러나듯이 수많은 그림, 사진 등과 부록의 연대표 등이 어우러져 입체적인 역사를 느낄 수가 있다.

움베르토 에코는 중세문명은 곧 시각문명이라고 했다. “성당은 돌로 된 거대한 책으로, 실제로 선전 플래카드와 TV 스크린의 기능을 한다.” 이 속에서 따분한 역사는 그야말로 다채롭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되고 있다.

자입트의 책은 타나까 아끼히꼬가 ‘새로운 중세’(지정, 2000)에서 21세기의 세계시스템을 ‘새로운 중세’로 향하고 있다고 파악한 것이나, 에코가 ‘포스트 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새물결, 1993)라는 책에서 포스트 모던적 현대문화를 중세적 특성으로 보려는 점 등에 설득력을 더해준다. 특히 유럽 중세의 특색으로 언급되는, 아끼히꼬도 언급하고 있지만, 다원적 주체들의 네트워크, 영토와 주체의 유동적 관계, 세계화 흐름 속에서 일개 국가의 경계 소멸 등은 현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중세는 르네상스가 왜곡한 것처럼 암흑 속에 정체되고 고정되어 있는 시기도 아니며 그렇다고 하나의 향수어린 꿈도 아니다. 오히려 찬란했지만 비참했던 시기이며, 어두운 절망 속에서 모순과 갈등이 뒤엉키는 카오스의 세계에서 ‘보다 아름다운 삶에의 열망’을 간직한 시기였다. 빈부, 가치관, 가상과 실재 등 또다른 측면에서 극단을 치닫는 현대사회에서 중세인들의 욕망은 회복해야 할 잃어버린 꿈이다.

<학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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