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전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 전시를 보러 갔다. 전시 작품의 의미나 완성도를 떠나서, 선정된 4명의 작가 중 가장 자극적인 작품을 내놓은 작가는 단연코 정윤석 작가였다. 전시실 입구부터 세워진 19세 미만 출입금지 팻말을 지나 검은 가림막 사이를 들어가면 암실처럼 온통 어두운 공간에서 밝게 빛나는 정윤석 작가의 작품들을 발견할 수 있다. 작품성이 대단해 밝게 빛난다고 표현을 쓴 것이 아니다. 작품들은 스크린 속에서 말 그대로 빛을 발하며 관람객의 망막에 침투했다. 

  작품의 이름은 <내일>로, 중국의 섹스돌 공장에서 이루어지는 작업과 그 인형을 이용한 남성의 성욕 처리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달궈진 인두가 인형 안을 헤집을 때, 완연히 사람의 형태를 갖춘 채 폐기된 인형들이 한데 모여 고기처럼 기계 속에서 갈려 나올 때, 구토가 치밀어 오를 만큼 두려웠다. 인간 여성을 정확히 모방한 그 물건이 거리낌 없이 폭력적으로 다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논란과 구설수를 만들어 작가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는 목표였다면 그 목표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가 내세운 인간다움에 대한 성찰이라는 주제는 자극적이고 가학적인 표현에 가려져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예술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죄책감 없이 가학성을 분출하고 싶었던 걸까? 이 작품은 예술이라기보다는 배설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이 얄팍한 유희는 겉모습만 겨우 예술이라는 구색을 갖춘 채 말초적인 감각만을 일깨운다.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쾌락에도 질적 차이가 있음을 밝히며 강하고 순간적인 쾌락을 하위 쾌락, 지속적인 쾌락을 상위 쾌락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상위 쾌락을 추구해야 하는데, 이는 절제를 통해 얻을 수 있다. 하위 쾌락은 정신적 노력 없이 얻을 수 있고 채워질수록 그 감각이 무뎌져 결국 고통만을 준다. 또한 영국의 공리주의자 존 스튜어트 밀은 쾌락을 질적으로 구분하며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더 낫고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라는 말을 남겼다. 감각적 쾌락보다는 지적이고 도덕적인 쾌락이 질적으로 우월하다는 뜻이다. 

  나는 예술을 창조하는 사람이 아니며, 예술의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를 축소할 권리 또한 없다. 그러나 본인의 폭력과 자극에 대한 욕망을 정제하지 않고 대중 앞에 내보이는 것이 좋은 예술이 아님은 안다. 동시에 나는 정윤석 작가의 <내일>이 예술이라고 이름 붙여지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이 추구해야 할 종류의 예술이 아님은 안다. 예술이 재미없고 도덕적이기만 할 이유는 없지만, 이 작품은 인간다움에 대한 성찰이라는 의도를 담고 있지 않은가? 의도 전달에 실패함과 동시에 불쾌한 자극만을 겨준 이 작품을 에피쿠로스는 하위 쾌락이라 정의할 것이며, 밀은 질 낮은 쾌락이라 명명할 것이다. 

노소연 학생
영어영문학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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