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작품을 볼 때마다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막막하신가요? 난해하게 본 작품이 대외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거나 재밌게 본 작품이 저평가받는 황당한 경우를 한번쯤은 경험했을 텐데요. 예술작품을 마주할 때마다 시야가 흐릿해지는 분들을 위해 문화부가 작품을 보다 멀리 내다볼 수 있도록 맞춤 안경을 만들어드립니다. 이번주는 안경의 도수를 실존주의로 맞춰 봤습니다. 함께 안경을 쓰고 작품을 보러 가봅시다!

※본 기사는 김한식 교수(프랑스어문학전공), 변광배 퇴임 교수(한국외대 미네르바 교양대학), 이진오 교수(경희대 후미니타스 칼리지)를 대상으로 개별적으로 진행한 소설 『이방인』(알베르 카뮈 씀) 실존주의 비평 자문 및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기자가 작성한 비평문입니다. 

알베르 카뮈는 1942년 『이방인』을 발표하며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이어 그는 ‘우리 시대 인간의 정의를 탁월한 통찰과 진지함으로 밝힌 작가’라는 평과 함께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알베르 카뮈는 1942년 『이방인』을 발표하며 문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이어 그는 ‘우리 시대 인간의 정의를 탁월한 통찰과 진지함으로 밝힌 작가’라는 평과 함께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사진출처 네이버

탕! 짤막하고도 요란한 총소리가 한낮 고요한 바닷가의 침묵을 깼다. 총에 맞은 사람은 숨이 그대로 멎었고, 방아쇠를 당긴 ‘뫼르소’는 순식간에 살인마로 둔갑했다. 모든 사건은 찰나의 순간에 벌어졌다. 뫼르소는 왜 총을 겨눈 걸까. 이 모든 게 단지 ‘햇살이 눈부셔서’ 저지른 일이라면 믿겠는가? 우리에게 마치 이방인처럼 낯선 뫼르소의 삶을 나란히 거닐어봤다. 

  애써서 뭐 해, 어차피 다 죽을 건데
  뫼르소는 직장을 다니며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부조리를 인식한 인물이다. 이때 부조리란 내가 실존하는 이유, ‘왜 사는가?’라는 질문과 동시에 죽음, 존재, 우주 등 방대한 세계에 대한 개념을 떠올렸을 때 드는 막막한 감정을 일컫는다. 부조리를 인식한다는 건 해당 감정을 받아들이고 사소한 현재의 존재에 개개인이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해 행복을 찾는 행위 전반을 뜻한다. 

  뫼르소는 소설 시작부터 이미 부조리를 지각했다. 뫼르소는 유년 시절 교수가 되길 꿈꿨었다. 하지만 집안 사정으로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면서부터 그는 어차피 사람은 죽기에 원대한 꿈을 좇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로 인해 훗날 파리로 출장을 갈 드문 기회가 생겼지만 이를 포기한다. 파리에 가지 않아도 현재 머무르는 작은 도시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부조리를 초반에 인식하고 인생을 통찰한 매우 성숙한 캐릭터다. 

  인생의 부조리함을 일찌감치 받아들였기에 뫼르소는 매사에 덤덤한 태도를 보인다. 자신과 결혼할 생각이 있냐는 여자친구 ‘마리’의 질문에도 그는 “아무래도 좋으니 마리가 원한다면 결혼해도 좋다.”라고 미지근하게 답한다. 현재 마리와 맺고 있는 연인 관계에 충분히 만족해 결혼을 굳이 약속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뫼르소는 직업도, 연애도 현 상황에서 더 나아가야 할 필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못한 채 현재에 충실한 삶을 계속 이어나가는 인물인 셈이다. 

  잔잔한 뫼르소란 강에 던져진 돌 3개
  부조리를 이미 받아들이고 현재에 충실히 임했던 뫼르소는 ‘3가지 죽음’을 마주하면서 부조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혼란을 점층적으로 겪게 된다. 아무리 인생에 통달한 뫼르소일지라도 ‘죽음’이라는 극한의 부조리를 본인이 직접 3번이나 경험함으로써 평탄했던 그의 삶은 변화를 맞이한다. 첫 번째는 바로 ‘어머니의 죽음’이다. 그에게 어느 날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하나가 온다. 이를 보고 뫼르소가 보인 반응은 “어머니가 오늘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오늘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제였을지도.”가 전부다. 어머니가 죽은 날짜도 제대로 모르다니. 가히 충격이다. 장례식장에서 뫼르소는 다른 조문객들처럼 소리 내 울지도 않고, 관을 열어 어머니를 보라는 주위의 권유도 거절한다. 장례식을 늦은 시간까지 치르고 집에 돌아갈 때 그는 이제 잘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으며 바로 다음 날 여자친구 마리와 데이트를 하는 등 일상으로 금세 복귀한다. 

  어머니의 죽음에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뫼르소의 태도를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솔직했을 뿐 여타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양로원에서 온 전보에는 ‘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조의를 표함’이라고 쓰여 있었기에 해당 전보만으로는 어머니의 사망 날짜가 정말 어제인지, 오늘인지 불확실했다. 또한 슬픈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은 목청껏 소리 내 우는 방식만 있지 않다. 장례식장에서 우는 행동은 사회 규범에 따라 사회가 기대하는 행위지, 당시 무표정 너머 뫼르소가 느낀 감정은 타인이 알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수면욕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 중 하나이며 뫼르소가 사람임을 고려해보자. 그는 늦은시간까지 장례식을 치뤄 피곤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집에 도착해 잠을 잘 생각에 기뻐하는 행위는 어쩌면 당연하다. 그저 솔직하게 자기 생각, 감정에 따라 행동한 그를 불효자라고 치부하며 수군대는 사람들 속에서 뫼르소는 다시 고립된 감정에 압도, 즉 부조리를 인식하지 못하는 모습을 점차 보이기 시작한다. 

  두 번째로 뫼르소가 맞이한 죽음에서 부조리는 극대화된다. 두 번째 죽음은 ‘아랍인의 죽음’으로 뫼르소가 만든 죽음, 즉 살인이다. 새로 사귄 친구 ‘레몽’이 주선한 장소에서 놀다가 아랍인을 총으로 쏴 죽였다는 죄목으로 그는 재판장에 서게 된다. 재판관이 뫼르소에게 왜 총을 쐈냐고 묻자 그는 “햇살이 눈부셔서”라고 답한다. 그리고 총을 손에 쥐기까지 일련의 과정은 모두 우연이었다고 항변한다. 

  반면 사람들은 뫼르소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은 채 그를 극악무도한 살인마로 취급한다. 급기야 뫼르소가 어머니 장례식 다음 날 해수욕을 하고 영화를 보며 좋아했다는 사건과 무관한 사실에 근거해 해당 사고는 의도된 살인이라고 단정 짓는다. 결국 뫼르소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모든 게 계획된 살인이었을까? 아니다. 우발적 범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녔다. 뫼르소는 레몽이 쥐고 있던 총을 평소 폭력적인 그가 범죄를 혹여나 저지를까 봐 오히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자신이 들겠다고 자처했다. 또한 아랍인이 당시 칼을 들고 뫼르소에게 다가왔고 이미 레몽은 그에게 칼을 맞아 다친 상태였다. 목숨에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오후 내리쬐는 무더운 햇볕 아래 극도의 불안감을 견디지 못하고 뫼르소는 끝내 방아쇠를 당겼다. 재판 때 한 발언처럼 그는 정말 햇살이 눈부셔서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뫼르소가 살인의 계기를 지나칠 정도로 사실에 가깝게 밝혔음에도 재판 과정에서 재판관을 비롯한 사람들은 이를 진정으로 이해하려 들지 않고 외면한다. 변호사는 살인의 무고함을 지나치게 포장하고, 검사는 살인사건과 전혀 상관없는 장례식장 태도 문제를 들먹이며 해당 사건은 의도가 다분한 살인이었다고 질책한다. 이때 뫼르소는 자신의 살인 동기를 진정으로 궁금해하지 않는 변호사, 검사, 배심원, 재판관 사이에서 실존의 부재,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즉 부조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에 완전히 다다른 것이다. 

  마지막 죽음은 뫼르소, 바로 ‘자기 자신의 죽음’이다. 사형선고 이후 죽음을 앞둔 뫼르소는 한 신부를 만난다. 하나님을 통한 구원을 제안하는 신부의 방문을 계속 거절해왔지만 신부는 뫼르소 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 기도를 제안한다. 이때 뫼르소는 신에게 선처를 구하자는 신부에게 극심한 분노를 느낀다. 존재하지 않는 허상에 희망을 걸며 이에 동참하자는 신부를 보며 뫼르소는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그는 몸을 불태워버릴 거라고 소리치며 신부를 내쫓는다. 죽음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자신의 본질과 사실을 들여다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뫼르소의 싫증이 급기야 화로 이어진 것이다. 뫼르소가 이처럼 불같이 화를 내는 행위는 그가 부조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의 정점에 달했음을 나타낸다. 

  단두대에 오른 순간마저 즐겁게 맞이할 수 있다
  평온하게 부조리를 잘 받아들여 왔던 뫼르소는 극단의 부조리를 상징하는 죽음을 3번이나 경험하면서 부조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혼란기에 접어든다. 하지만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며 극한의 부조리조차도 이내 수용하는 성숙한 면모를 보인다. 어머니가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말이다. 황혼의 나이에 이뤄진 어머니의 사랑은 그녀도 부조리를 인식한 인물이라는 걸 뜻한다. 어머니도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남은 생애를 온전히 즐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이에 뫼르소는 자신 또한 부조리에 더이상 좌절, 분노하지 않고 이를 받아들여 남은 짧은 생애를 진정 즐기기로 결심한다. 뫼르소가 사형집행을 받는 당일까지도 외로워하지 않는, 어떠한 극적인 부조리도 받아들인 숭고한 사람으로 거듭나며 소설은 끝난다. 

  뫼르소가 아직도 낯선 이방인 같은가? 그는 누구보다 인간 본연에 맞닿아있는, 우리의 본모습과 매우 닮은 동일인 그 자체다. 먼일 같지만 결국 우리 모두 죽음을 앞두고 있다. 죽음 앞에서 당신은 어떤 태도를 취할 텐가. 허무해 하며 좌절할 것인가, 종교라는 허상을 통해 극복할 것인가. 아니면 뫼르소처럼 남아있는 매 한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담담히 받아들일 것인가. 후자일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삶의 본질을 느낄 수 있다. 그때 우린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을 느끼고 세상이 나와 다름없는 형제처럼 여겨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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