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식 감독(경영학과 84학번)은 초등학생 국가대표, 청소년 국가대표를 거쳐 프로구단에 입단했고, 은퇴 후 코치로 활동하며 야구계의 정석 코스를 밟는다. 하지만 이에 안주하지 않고 인생에서 터닝 포인트를 맞을 때마다 과감한 선택을 감행했다. 그런 그에게는 항상 새로운 길이 열렸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결과가 주어졌다. 하지만 고정식 감독은 단지 복이 많았을 뿐이라며 자신을 낮춘다.

사진 김수현 기자
사진 김수현 기자

초등학생 때 마주한 야구 유니폼은 고정식 감독(경영학과 84학번)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지금껏 그가 야구의 길을 걸어오게 해준 초석이 됐다. 유니폼으로 시작한 야구에서 포수의 재능을 발견한 그는, 프로야구 선수와 코치 생활을 거쳐 모교인 중앙대의 야구부 감독으로 돌아와 학생 선수들을 진두지휘한다. 진로 선택의 폭이 좁아진 야구부 후배 선수를 향한 그의 관심과 애정은 가히 남다르다. 고정식 감독의 꿈은 그들을 향한 따뜻한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야구를 했다고 알고 있는데, 학부 전공이 경영학과다. 
 
  “초등학생 때부터 야구를 했어요. 학부 전공이 경영학과인 데는 사연이 있죠.(웃음) 제가 대학에 입학할 때는 특기자전형이 있었어요. 청소년 국가대표가 되면 대학 입학 자격이 주어졌죠. 중앙대 입학 자격을 얻고 전공을 선택해야 했는데 주변에서는 체육교육과를 권했어요. 하지만 저는 체육 교사라는 직업을 별로 안 좋아했거든요. 선택할 수 있는 다른 전공 중에 경영학과가 있어서 선택하게 됐죠.” 

  -야구를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 유니폼이 예뻐서 유니폼 한번 입어보고 싶은 마음에 운동을 시작했어요. 지금은 유니폼을 입고 싶으면 사면 되지만 당시에는 야구부가 돼야 입을 수 있었죠. 그래서 야구부에 들어갔답니다. 유니폼 때문에 시작한 야구로 초등학생 때 국가대표도 하고 여기까지 왔네요.” 

  -초등학교 국가대표 시절 기장 기억에 남는 경험은 무엇인가. 

  “6학년 때였어요. 처음 태극마크를 달고 세계리틀야구선수권대회 극동 지구 예선전을 치르러 대만에 가게 됐죠. 집안의 온 가족들이 ‘우리 아들 태극마크 달고 대만 간다’고 하며 버스를 빌려 환송을 나왔어요.(웃음) 당시는 여행 자유화가 되지 않았을 때였어요. 국내 여행도 많이 다닐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는데 해외를 가니 ‘야구를 잘해서 국가대표가 되면 대회도 나가고 해외여행도 가고 재미있구나’ 하고 생각했죠. 그런 일들이 모여 운동을 계속할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어떤 계기로 포수를 맡게 됐는지. 

  “처음 야구를 시작했는데 제가 공을 잘 받더라고요. 포수는 금방 맡을 수 있는 포지션이 아니거든요. 야구공을 받는 일은 위험하니까요. 하지만 처음부터 공을 잘 받으니 당시 감독님께서 포수를 하라고 하셨어요. 그때부터 포수를 맡았죠. 맡은 역할을 잘하니 시합도 일찍 나가게 해 주셨고, 시합 때도 벤치에 앉아 있기보다는 경기에 많이 출전할 수 있어서 재미있었답니다.” 

  -대학 졸업후 바로 롯데자이언츠에 입단했다고. 

  “맞아요. 졸업을 1988년 2월에 했어요. 졸업 전 1987년 12월쯤 프로구단이 모여서 어떤 선수를 데려갈지 드래프트를 했죠. 당시 롯데자이언츠에서는 1차 지명은 연고지에서 하고 2차는 연고지 외에서 선발했어요. 2차 지명에서 선발돼 롯데자이언츠에 입단했죠.” 

  -1992년 롯데자이언츠의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였는데. 

  “선수 생활을 6년간 했는데, 입단 이후 부상 때문에 3년 동안은 거의 훈련을 못 했어요. 한국시리즈 당시에도 어깨 부상 때문에 대타로 준비하고 있었죠. 

  팀이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시리즈에 올라왔거든요. 단순히 정규리그 우승하고 기다리다 한국시리즈에 출전한 게 아니라 몇 경기를 치르고 올라왔기 때문에 선수들이 굉장히 지쳐있었죠. 아무도 우승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모두 굉장히 열심히 했죠. 선수들끼리도 잘 뭉쳐 있었고요. 계속되는 경기를 거치고 우승까지 거머쥐며 우승은 목표로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열심히 하다 보니 이뤄지는 결과라는 점을 깨달았답니다.” 

  -선수 은퇴 이후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지도자 과정을 밟았다고. 

  “은퇴 이후 5년간 롯데자이언츠에서 1군 매니저로 일했어요. 5년 정도 일하고 나니 코칭을 해보고 싶었죠. 당시 장효조 코치님과 같이 미국 메이저리그에 가서 공부를 해보자고 결심했어요. 그때가 IMF 외환위기였거든요. 모든 회사가 인원을 감축할 때였고 부도난 회사도 많았죠. 일반적으로는 해고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는데, 저는 사표를 냈으니 주변에서 다들 정신 나간 사람 아니냐고 하더라고요.(웃음) 저는 터닝 포인트에서 항상 과감한 결정을 내려요. 결국 미국으로 지도자 과정을 밟으러 떠났죠. 통역사도 없이 미국 땅에서 운동장 안에 있는 시간 동안은 맨땅에 헤딩하듯 부딪치면서 배웠답니다.” 

  -약 10년간 여러 프로구단에서 코치로 일했다. 코치로 잘 스카우트되는 본인의 장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저는 누가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업무를 주면 맡은 일보다 더 많이 해내려고 하죠.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했지만 백과사전도 즐겨보고 나름대로 공부를 많이 했어요. 영어, 중국어, 일본어 실력도 나쁘지 않고요. 일을 맡기면 곧잘 해낸다는 인식이 있어서 추천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해요. SK와이번스, LG트윈스, 두산베어스, 롯데자이언츠, 다시 SK와이번스와 두산베어스 코치로 일한 이력은 프로야구 코치 중에도 흔치 않은 일이거든요. 중앙대 야구부 감독이 되지 않았다면 또 다른 프로구단에 코치로 부임할 수도 있었고요.” 

사진 김수현 기자
사진 김수현 기자

   -중앙대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한 계기는. 

  “2012년에 중앙대 야구부 감독 자리가 공석이었어요. 당시 중앙대에 강사로 일하던 제 친구가 ‘야구부 감독을 공개 채용한다고 하니 한 번 지원해보지 않겠냐’고 권유해서 지원을 하게 됐죠. 선수 생활, 매니저, 코치를 거치며 선수들의 빈틈을 채워주는 일에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프로구단에서 10년 이상 코치로 일하면서 선수는 많이 가르쳐봤잖아요. 중앙대 야구부 감독으로서 학생 선수들의 빈틈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고 싶었죠.” 

  -중앙대 야구부 감독으로서 본인만의 훈련법이 궁금하다. 

  “항상 실전처럼 연습하라고 지도해요. 시합 때 잘하려고 하지 말고 연습 과정에서 시합 같은 훈련을 해야 하죠. 모든 연습을 실전처럼 하는 일보다 더 좋은 연습은 없다고 생각해요. 훈련을 실전처럼 하다 보면 실제 경기에서는 그냥 하면 되죠. 잘하려고 할 필요 없이 연습하듯 여유를 갖고 경기에 임하면 된답니다.”

“되게 역설적이지만 야구에 절대 목숨 걸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예체능은 타고난 자질이 없으면 힘든 분야이기 때문에 야구를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성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요. 무턱대고 야구 연습만 계속 시키다 보면 야구도 안 되고 나중에 그 학생의 인생에도 큰 도움은 안 되거든요.” 

  -2018년 중앙대가 세계대학 야구선수권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해 동메달을 거머쥐었다고. 

  “원래 대표 선수를 선발해야 하는데 중앙대 단일팀이 한국 대표팀으로 선정돼서 출전하게 됐죠. 당시 대표팀을 선발할 때 착오가 생겨 팀을 꾸릴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렇지, 단일팀으로 출전하는 일은 전무후무해요. 중앙대 야구부가 운 좋게 기회를 얻었죠. 팀이 항상 중상위권에 있으니 연맹에서 중앙대 단일팀으로 출전 제안을 받았어요. 그래도 메달을 따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죠. 당시 세계대학 야구선수권대회에 최다우승국인 미국을 포함해 쟁쟁한 팀이 많이 참가했거든요. 단일팀으로 출전해서 잘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결국 해내더라고요. 대회가 끝나고 시상식에 일장기, 대만 국기, 태극기 이렇게 올라갈 때 매우 뿌듯했죠.” 

  -모교 야구부에서 감독으로 일하는 느낌이 남다를 듯하다. 

  “옛날 생각이 많이 나요. 재학생 시절 생활했던 숙소 생각도 나고요. 한편 험난한 길을 가고 있는 지금의 야구부 학생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죠. 옛날처럼 실업팀도 없고 프로구단에서 선발하는 대학생 수도 너무 적고요. 졸업 후 진로의 폭은 좁은데 감독으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서 안타까워요.” 

  -앞으로 야구부 학생들에게 어떤 감독으로 불리고 싶은가. 

  “대학교 지도자는 특히 진로지도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좋은 성적을 내는 일도 중요하지만 졸업하면서 꼭 야구선수가 아니더라도 학생들 본인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찾아주는 지도자가 되고 싶어요. 목표라기보다는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이죠. 야구부 선수들에게 인성을 가르치는 일 또한 매우 중요해요. 늘 말보다는 행동으로 먼저 보이려고 노력하죠. 주변 사람들은 저를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이라고 불러줘요. 우리 학생들에게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중앙대

  “제게 중앙대는 운명이에요. 가족 중에서도 중앙대 출신이 많고요. 또 모교에서 지도자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큰 영광이라고 생각해요. 저를 중앙대 감독으로 선택해주신 일도 쉽지 않으셨을 텐데 말이죠. 학교를 빛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음껏 빛내고 싶답니다. 지금은 대학교 운동부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서 아쉬워요. 제가 재학생일 때는 정규 채널에서 대학 리그 결승전 중계방송을 하기도 했는데 말이죠. 그럴 일이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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