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는 신선한 음식 같은 거야. 냉장고에 넣어두면 맛이 떨어져. 젊은이에게 제일 나쁜 건 아예 판단을 내리지 않는 거야.” 김영하의 소설 『퀴즈쇼』의 한 대목이다. 우리는 무수한 판단 속에 살아간다. ‘나’의 일은 작게는 오늘 무슨 식사를 할 것인가부터, 크게는 앞으로의 미래를 그려가는 것까지 많은 고민 끝에 결정한다. 하지만 주변의 사소하고 불편한 일에는 개입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의 시간과 ‘남’의 시간은 별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광명에 북유럽풍 대형 가구점이 입점했다는 소식을 듣고 방문했던 기억이 있다. 달리는 버스에 탑승하던 나를 맞이했던 것은 마이크의 굉음을 통해 울려 퍼지는 노조원들의 목소리와 “일한 만큼 받고 싶어요”라는 간단명료한 팻말이었다. 많은 사람은 늘 그렇듯 이 소리를 자신들의 여가시간을 방해할 ‘소음’으로 인식하고 지나쳤다. 

  이 가구점은 ‘북유럽식 복지’,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타이틀로 소비자를 끌어왔다. 하지만 타이틀의 안쪽은 상당히 부자연스럽다. 높은 층고. 넓은 복도. 모던한 쇼룸. 그럴듯한 겉 포장과는 다르게 직원들은 6분룰이라는 규칙에 따라 화장실에 갈 시간도 없이 일한다. 반면 이 기업의 스웨덴 노동자들은 피카타임(Fika-time)이라 불리는 추가적인 휴식 시간을 부여받는다. 불공정하고 불편한 현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유례없는 감염병인 코로나19가 번지면서 많은 회사는 ‘탄력근무제’를 선택 시행하고 있다. 탄력근무제는 유연한 조직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근무시간을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기업 역시 탄력근무제를 도입했지만, 직원 스스로 근무 시간을 조정할 수는 없었다. 우린 이런 ‘남’의 모습에서 ‘나’의 상황을 발견할 수 있다. 

  많은 20대 청년들은 프랜차이즈나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다. 아르바이트 인원이 많다면 근무시간은 자동적으로 줄어들고, 바쁜 날이 있다면 필수적으로 스케줄을 조정해야만 했던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타인의 노동환경은 ‘나’의 환경과 제법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은 불편한 사실, 또는 자신과 상관없어 보이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을 싫어한다. 단지 당사자가 노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지?’라는 생각으로 주위의 불편한 사실들에 아무런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면 더 큰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의문을 감추고 '남들이 하듯이' 한다면 우리가 머무를 정류장은 허물어져 버리고 만다. 이 가구점의 노동자들처럼 당연한 사실에 의문을 품으며 목소리를 내보자. 주위의 불편한 사실들에 의문을 갖고, 다양한 방법으로 개선 방안을 찾아보자. ‘나비효과’라는 말처럼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우리의 삶이 원하는 답을 제공할 것이다.

배준영 학생
글로벌금융전공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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