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새처럼 차가웠던 ‘아가씨’가 뜨거운 날갯짓하기까지
  • 김유진 기자
  • 승인 2021.03.22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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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기자의 아무런 영화비평

책을 마구 찢은 뒤 서재를 뛰쳐나와 두 여인이 어디론가 신나게 뛰어간다. 생기 따위 없었던 그녀들 얼굴에 진심 어린 웃음이 비친다. 유년 시절부터 오랜 기간 머물렀던 저택에 한 치 미련도 없다는 듯 해맑은 두 사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 속 그녀들의 사연을 헤아려봤다. 

영화 '아가씨'는 2016년에 개봉해, 그 해 칸 영화제 벌칸상과 청룡영화상을 비롯한 수많은 상과 찬사를 받았다.
영화 <아가씨>는 2016년에 개봉해, 그 해 칸 영화제 벌칸상과 청룡영화상을 비롯한 수많은 상과 찬사를 받았다.

  그저 살아있는 시체였을 뿐
  영화 <아가씨>는 어릴 적 부모를 잃고 후견인 이모부의 엄격한 보호 아래 살아가는 귀족 아가씨에게 백작이 추천한 새로운 하녀 숙희가 찾아오며 이야기가 시작한다.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될 아가씨를 유혹해 돈을 가로채겠다는 사기꾼 백작의 제안을 숙희가 받게 된다.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아가씨가 백작을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 서로 속이는 내용이다. 

  영화 속 남성 캐릭터들은 여성을 하나의 주체로 존중하기보다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모부 코우즈키는 아가씨를 오로지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만 바라본다. “아가씨의 몸은 물새처럼 차가울 것”이라는 백작의 말에 “오랜 훈육의 결과”라고 흡족해하며 말이다. 백작도 아가씨를 오직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긴다. “당신 눈도 손도 아니고, 오로지 당신 돈! 당신 가진 것 중에 으뜸은 돈!”이라고 아가씨에게 대놓고 말한다. 아가씨뿐 아니라 숙희를 저택에 들이기 위해 하녀를 속이고 숙희에게도 돈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점에 비춰봤을 때 그가 여성을 오로지 도구로만 여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가씨는 여성을 수단화하고 억압하는 남성들 속에서 성차별에 체화된 시대적 인물을 대변하고 있다. 여성이란 이유로 신사들 앞에서 포르노그래피를 낭송해 그들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리인 역할을 수십년간 수행해왔기 때문이다. 그녀 주위에는 변태적인 낭만을 꿈꾸는 이모부 코우즈키, 백작, 신사들 뿐이다. 그 사이에서 그녀는 사랑은커녕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약을 그 무엇보다 갖고싶어 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영화 내내 보인다. 

   아가씨를 해치러 온 구원자, 숙희
  숙희도 아가씨를 속여 그저 돈을 벌고자 코우즈키의 자택에 제 발로 찾아간 속물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라며 비관하는 아가씨에게 “태어나는 게 잘못인 아기는 없어요.” 라고 위로해주는 등 아가씨를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숙희는 점차 보인다. 급기야 아가씨가 벚꽃 나무에 목을 매려고 할 때, 울면서 아가씨를 속이려 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바로 숙희가 아가씨에게 진정으로 공감함으로써 두 여성 간 유대 형성이 시작된 순간이다. 

  코우즈키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아가씨가 그동안 강제로 낭독해온 음란한 그림과 글을 숙희는 처음 마주한다. 이에 그녀는 책과 그림을 마구 찢으며 분노하고 곧장 아가씨와 저택 탈출을 시도한다. 학대에 익숙해져 낮은 높이의 담장조차 넘기 주저하는 아가씨에게 가방을 깔아주고 손잡아주며 담장을 넘을 수 있도록 숙희는 돕는다. 도움을 받아 아가씨가 담장을 뛰어넘는 행위는 억압받던 한 여성이 하나의 주체로 재탄생함을 의미하는 동시에 여성들의 끈끈한 연대를 내포한다. 아가씨는 주체적인 여성 숙희로 인해 수동적 객체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망을 마주하고 이를 쫓는 자발적인 여성 ‘히데코’로 탈바꿈한 셈이다. 

  누군가의 물건에서 주체로 나아가기가 분명 쉬운 일은 아닐 테다. 억압에 익숙해진 탓에 담장 앞에서 수많은 현실판 아가씨들이 주저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들에게 손을 내밀어줄 숙희도 옆에 있지 않은가. 함께라면 담장은 충분히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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