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이 더 이상 속세를 떠난 고고한 상아탑으로 대접받지 못하며, 무엇보다도 먹고사는 문제가 절실한 오늘날의 상황에서 뜬금없이 ‘초월’을 이야기하면 도를 닦는 것을 연상하며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바람직한 미래 설계를 위해 대학의 본질은 초월에 있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싶다.

  먼저, 대학은 기존에 주어진 세계관과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에서 ‘초월의 공간’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세상에 던져진 ‘세계-내-존재’이다. 우리는 특정한 지역과, 전통 그리고 문화의 영향아래 살아왔다. 그래서 쉽게 진영논리에 매몰되는 경향을 가지기도 한다. 그러나 대학은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해온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 균형잡힌 판단력을 연마하는 곳이다. 마치 제한된 시야만을 허용하는 골짜기를 지나 정상에 오르면 개방된 시야를 가질 수 있듯이 만남과 독서를 통해 지속적으로 지평을 확장하면 자기고양(高揚)의 긍정적 힘이 생겨나고,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얻을 수 있다.  

  둘째, 대학생활은 관성적이고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인간상(人間像)을 찾아간다는 점에서 ‘초월의 시간’이다. 이제 우리는 익숙한 보호막이나 보살핌에서 탈피하여 힘든 ‘자기 돌봄’(epimeleia heautou)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이 길의 요체는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이다. 이것은 자신의 무지에 대한 각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에게 전념하고 자신을 훈련시키며 스스로 변화되어야 할 필요성까지도 함축한다. 이러한 노력 속에서 미래로 시선을 돌리고 개인의 성장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발전도 함께 도모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형성된다.  

  셋째, 대학인은 자신의 인생과 세계를 창조한다는 의미에서 ‘초월의 존재’이다. 더욱이 4차 산업혁명과 같은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고려할 때 자기혁신과 자기창안을 통해 활로를 모색하는 것은 선택지가 아니라 당위이다. 이 때 ‘담론은 삶이 아니며 그것의 시간은 너희의 시간이 아니다’는 푸코(M. Foucault)의 표현처럼 이론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빛을 발하는 실천적 지혜와, 닥쳐오는 상황에 부딪히며 체화된 맷집이 중요해 보인다. 그러므로 대학인은 삶을 창조적으로 구현하는 ‘실존의 미학자’가 되어야 하며, 여기서 내실 있는 인생의 멋도 기대할 수 있다.  

  ‘아쉽지 않고 아프지 않은 인생이 어딨어!’라는 한 배우의 인생 조언처럼 우리가 마주하는 일들은 버겁고, 기대는 허망하게 실망으로 끝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도 자기의 성(城)안에만 안주하는 것은 비록 그것이 편안하고 자존심을 유지시켜준다 하더라도 가능한 만남과 새로운 체험의 희열을 포기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런 태도는 자신의 고유한 문제해결 능력저하시키는 ‘믹소포비아’(Mixphobia)라는 잘못된 길로 빠져들게 할 수도 있다.  

최성환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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