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스며들다’의 뜻을 아시나요? 스며들다는 ‘속으로 배어들다’와 ‘마음 깊이 느껴지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통에 스며든 오늘’에서는 선조들의 삶 속으로 직접 배어 들어가 마음 깊이 전통을 느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민화를 만나고 왔습니다. 민화가 걸어온 전통의 발자취를 함께 따라가봅시다! 서민희 기자 tjalsgml0928@cauon.net

이야기를 ‘읽는’ 그림 
일상의 수많은 소망을 형상화하다

역사 드라마나 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인공이 있다. 바로 민화다. 중전의 침실을 비롯한 궁궐부터 왁자지껄 사람이 모이는 시장까지 민화는 모두의 삶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민화는 어떻게 우리네 일상으로 깃들었을까. 민화가 그려온 길을 거닐어 봤다.  

  격변의 바람을 타고 퍼진 그림    
  민화는 통일신라시대에, 잡귀를 물리치고 상서로움을 맞이하기 위해 문에 걸어 놓았던 그림으로 출발했다. 이런 전통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조선 후기부터는 민간으로 널리 확산돼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민화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절정의 인기를 맞이한다. 이 시기 조선은 신분제 질서가 해체되고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는 사회·경제적 격변기였다. 김선두 교수(한국화전공)는 민화 수요가 증가하는데 신흥부유층의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기술직 중인과 하급 관리, 상인은 민화 등의 그림이나 골동품을 수집해 집안을 치장했어요. 이런 취미가 서민층에게까지 확산하면서 폭발적으로 민화의 수요가 증가했죠.”
 
  활발한 수요에 맞춰 많은 민화가 생산·공급됐다. 주로 전국 각지의 화공과 떠돌이 화가들에 의해 민화가 그려졌는데, 이 과정에서 민화는 복을 기원하는 특징이 강화됐다. 송지수 한국민화협회 사무국 간사는 민화가 서민층뿐만 아니라 상류층까지 유행했다고 설명했다. “민화의 범주는 궁중회화부터 서민의 그림까지 광범위해요. 요즘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책가도는 정조의 사랑을 받은 그림이죠. 정조는 권위적인 일월오봉도를 대신해 책가도 병풍을 펼쳤다고 전해진답니다.” 

  열렬한 소원을 담아 
  조상은 자신의 소망에 따라 민화의 소재를 골랐다. 민화 속에는 현재를 행복하게 살고 싶은 현세구복 의미와 바람을 이뤄달라는 주술적 뜻이 담겨있다. 입신양명을 염원하며 튀어 오르는 ‘잉어’를 그렸고, 다산을 바라며 ‘과일’을 화폭에 담았다. 민화 속에 여러 소재를 섞어 다양한 소망을 쌓기도 한다. 병아리를 품고 있는 닭은 가정의 화목을 의미한다. 닭의 머리에 벼슬을 추가해 출세를 더불어 기원했다. 김선두 교수는 민화에 염원이 담기기 때문에 민화 속 연꽃이 색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이야기했다. “불교에서 연꽃은 더러운 진흙 속에서 피는 맑은 꽃으로 속세를 밝히는 진리를, 유교에서는 군자를 상징해요. 그런데 민화에서는 불교나 유교적인 의미와 달리 다산·행복·풍요·평화 등 길상적인 의미를 가진답니다.”
  
  민화는 때와 장소에 따라 쓰임새가 있는 실용화다. 아이가 태어나 처음 맞는 돌상을 비롯해 죽은 이의 정토행을 소원하는 장례식의 장막 등 집안 행사마다 민화는 자리를 지켰다. 일상 생활공간도 예외는 아니었다. 청아하고 시원한 느낌을 주는 연꽃은 더운 여름날 사랑방이나 대청마루를 장식하는 피서용 그림으로도 사용됐다. 모란꽃은 신방을 장식하는 병풍에 주로 그렸다. 이는 모란이 장수와 부귀영화를 상징하기 때문에 신혼부부의 새롭게 시작될 앞날을 축복하는 마음을 담았다. 조선시대 여성이 주로 시간을 보냈던 안방에는 정답게 노는 새와 물고기 등이 그려진 병풍을 뒀다. 김선두 교수는 부부간 금실이 화목하길 바라는 마음이 장소에 맞는 그림에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암수의 사이가 좋다고 알려진 원앙이나 예절을 표현할 줄 아는 동물로 전해진 꿩 등이 병풍에 자주 그려졌어요.”
  
  평면에 녹아든 입체 
  민화는 원근법·구도·비례에서 벗어나 자유롭다. 평면적으로 작품이 구성됐기에 그림 안에서 모두가 주인공인 듯한 느낌을 준다. 따라서 민화는 정통회화의 범주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잡화·속화·별화로 천시받았다. 송지수 간사는 조선 후기 소수 상류층의 문인화에서도 민화 속 주제와 채색 방식이 등장한다고 설명했다. “민화와 정통회화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민화를 정통회화의 아류로 보는 게 아니라 한 시대에 여러 미술 현상이 있었다는 시각으로 이해해야 해요.” 민화는 해학과 풍자를 자유분방한 시각으로 표현했다. 대표적으로 책가도가 있다. 여러 방향에서 보고 그린 듯한 다시점 구도로 구성돼 있다. 중요도에 따라 크기를 조절했으며 책 일부는 공중에 떠 있는 형태로 묘사됐다. 이러한 구도는 각각의 기물을 돋보이게 한다. 송지수 간사는 민화의 독특한 시각이 무한한 예술적 영감을 제공한다고 언급했다. “원근법·구도·명암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시점으로 표현한 입체주의와 일맥상통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전통으로 내일을 채우다 
  민화에는 한국적 아름다움이 녹아있다. 송지수 간사는 고구려 고분벽화와 오방색 등의 영향을 받은 강렬한 색채가 민화에 스며들어있다고 설명했다. “다채로운 색채감은 보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요. 시선을 사로잡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답니다. 소재가 가진 상징성, 길상적 의미로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점도 민화만의 매력이에요.” 전통 민화라는 씨앗은 현대 민화 작품으로 계승돼 꽃피워지고 있다. 송지수 간사는 파격적인 구성과 자유로운 형식이 현대 민화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이야기했다. “옛 민화를 보면 마치 오늘날 그림처럼 현대적이에요. 민화를 통해 선조들이 자신의 소망을 자유롭게 표현했듯이, 현대 민화도 유연하게 변주하며 마음을 표현하는 그림으로 재탄생하고 있어요.” 
 

이택균필 ’책가도 병풍’, 조선 19세기,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79호. 책가도 병풍은 10폭의 병풍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구도를 취한다. 매 폭마다 세로 3단 또는 4단의 서가를 배치하고 그 안에는 각종 서책과 골동품을 세밀하게 그렸다. 사진제공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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