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원래 그래왔다는 핑계를 내세우며 당장 눈앞의 차별에 등을 돌리곤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자리를 옮기기도 하죠. 그러나 차별받아 마땅한 사람은 없음을 알기에 다시 마주 보고 함께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이번 학기 사회부는 당연하다 생각해왔던 차별을 마주보고 여러분과 함께 당찬 발걸음을 내딛어보려 합니다. 이번 주는 ‘공공언어 외국어 남용’으로 당연한 듯이 차별받아온 사람들과 발걸음을 맞춰보겠습니다. ※기사에서 사용한 '공공언어'는 국립국어원이 정의한 개념 중 좁은 의미를 선택해 생산 주체를 공공기관으로 한정하여 사용했습니다.

‘글로벌에이징센터’, ‘골든시드프로젝트’, ‘융합 얼라이언스’, ‘한중 우호 카라반’. 간간이 아는 단어가 보이지만 내용을 짐작하기 어려운 이 단어들은 모두 공공언어다. 공공언어는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하기에 모든 국민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여야 한다. 그러나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게 된 외국어가 공공언어에도 쓰이면서 국민이 당연하게 보장받아야 할 권리가 침해되고 있다. 공공기관의 외국어 사용이 차별적인 공공언어로 이어지는 실태를 살펴봤다. 

  국어는 한국어, 공공언어는 외국어? 
  경기도청은 올해 ‘리모델링 컨설팅’, ‘집합건물 관리 매뉴얼·가이드’란 표현을 사용해 보도자료를 낸 바 있다. ‘컨설팅’과 ‘가이드’는 각각 ‘자문’과 ‘설명서’라는 우리말로 대체 가능한 언어다. 

  천안시에서 개발한 장애인 편의시설 정보전달 응용 프로그램 ‘천안애(愛)놀자’. 들어가 보면 ‘카테고리 선택’, ‘내가 참여한 매핑’ 등 외국어가 사용된 세부 항목이 보인다. 이 또한 ‘분류 선택’과 ‘내가 참여한 지도 제작’으로 충분히 순화할 수 있음에도 바꾸지 않았다. 

  공공분야의 외국어 남용은 정부에서도 인지해 온 문제다. 국립국어원은 2009년 ‘공공언어지원단’을 설치하여 공공언어 전반에 대한 지원 사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해왔다. 그러나 2014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실시한 ‘공공언어 인식 실태조사’에 따르면 500명의 응답자 중 20%는 여전히 ‘무분별한 외국어·한자어’를 공공언어의 문제점이라 꼽았다. 또한 ‘공공언어가 국민의 입장을 고려하여 잘 작성되고 있다’에 대해서는 27.1%만이 ‘잘 고려하고 있다’고 답했다. 

  최근 자료에서도 공공언어에서의 외국어 남용은 꾸준히 포착된다. 2019년 국립국어원은 ‘중앙행정기관 공공언어 진단 최종 보고서’를 통해 45개의 중앙행정기관 누리집 첫 화면에서 발견한 157개의 어려운 어휘를 지적했다. 이 중 불필요한 외래어·외국어는 71.3%를 차지했다. 외국어 남용이 공공언어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지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불필요한 외국어는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니다 
  공공언어에 외국어가 많이 섞일 경우, 주요 피해대상은 저학력자·노인·아동이 된다. 코로나 19  이후 발생한 외국어 접근성에 따른 정보격차가 이를 증명한다. 국립국어원이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팬데믹을 들어본 적이 있고 의미를 알고 있다’라는 물음에 ‘대학원 졸업 이상’은 92.3%가 ‘그렇다’고 답했지만, ‘최종학력 중학교 졸업 이하’에서는 51.1%만이 ‘그렇다’고 응답했다.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대학 진학률이 낮은 노인 또한 어려움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60대만 해도 대학 진학률이 10%밖에 안 돼요. 고등학교를 나왔다 하더라도 그 용어를 다 이해하는 건 아니랍니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한글문화연대의 ‘외국어표현에 대한 일반국민 인식조사’에 따르면 70세 이상 노인 응답자의 외국어 표현 평균 이해도는 100점 만점에 28.4점을 기록했다. 전 연령층 평균 이해도가 61.8점인 것과 비교했을 때 외국어로 된 공공언어 앞에서 노인이 겪을 어려움이 짐작된다. 

  더욱이 언어를 이제 막 배우는 아동에게 공공언어의 외국어 남용은 치명적일 수 있다. 학교 근처에 있는 ‘옐로 카펫’은 아동이 횡단보도를 이용할 때 안전하게 대기할 수 있는 노면 표시이다. 서울시 국어바르게쓰기위원회는 이를 ‘노랑 고깔’로 표현을 바꿀 것을 권고했다. 아동의 안전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구역인 만큼 그 이름은 아동과 일반 운전자 모두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건범 대표는 공공언어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타인의 처지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언어 약자가 아닌 사람들은 쉬운 영어 사용 정도는 대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이는 어딘가에서 문제를 겪고 있을 약자의 존재를 지우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죠.” 

  외국어를 알아도 어려운 공공언어 
  다양성을 배제한 공공언어는 결국 모두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2019년 경기도 지하철역 곳곳에는 K&R(Kiss&Ride)이란 표기가 등장했다. 영어권 문화에서 사용하는 말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운전자는 이곳이 무엇을 위한 장소인지 한눈에 이해하기 힘들다. 이 표지판은 한글문화연대의 건의를 통해 ‘환승 정차 구역’과 ‘잠시 주·정차 구역’으로 시정됐다. 이건범 대표는 「국어기본법」에 근거한 공공언어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정확한 정보를 주지 않아 그곳에서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었어요. 공무원들이 정확히 국어기본법을 숙지했다면 달랐을 수도 있죠.” 

  김미형 교수(상명대 한국언어문화전공)는 우리 사회의 공공언어가 전반적으로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2019년 국립국어원이 진행한 조사를 보면 140개의 어려운 정책 용어 중 공무원도 모른다고 대답한 단어는 81개에 달한다. 공공언어를 만들고 작성하는 공무원조차도 공공언어를 이해하기 힘든 실정인 것이다. “영어에 비교적 익숙한 젊은 층이나 전문가도 현재 우리 사회에서 사용되는 외국어들을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우리 사회의 원활한 소통을 방해하는 주요 원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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