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을 대비하던 문과생 필자가 배웠던 양자역학이란 다음과 같다. 고양이가 죽었는데 살았대. 어? 고양이가 살아있긴 한데, 죽어있기도 하대. 그게 무슨 소리야. 고양이가 살아있는데 죽었다고? 그게 가능한 거야? 고양이는 죽으면 죽는 거고, 살면 사는 거지. 그리고 왜 슈뢰딩거는 굳이 고양이로 했대?  

  고양이가 죽으면서도 사는, 두 가지 상태가 공존하는 이유는 전자가 부딪힐 때만 보이는 투명 인간이기 때문이다. ‘관계성’ 이라는 특성에 따라 입자들의 위치는 모든 순간 기록되지 않고, 특정 순간의 위치만 기록되는 것인데 그 순간이 바로 다른 무언가와 상호작용하는 순간이다. 다시 말하면 입자가 어디에 있는 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입자가 어떻게 다른 것에게 자신을 드러내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이는 미시적 세계가 우리 사회와 닮아 있음을 보여준다. 상호작용을 하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 않는, 그렇지만 존재하고는 있는 개별적 특성처럼 사람도 혼자 살아간다. 부딪히고 표현하였을 때야 비로소 타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으며 말하지 않으면 그의 마음을 읽기는 어렵기에 끊임없는, 무한한 소통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복수 전공을 하고 있는 사회복지학 수업을 듣고, 3개월간의 동아리 활동을 하며 몇 가지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가 아프도록 고민했다. 결과는 ‘사회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사회문제에 관한 이슈를 다른 친구들에게 얘기하고, 공감하기도 혹은 약간의 논쟁을 하기도 하며 더 나은 방향성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미시적 세계에서 말하는 상호작용인 것 같다.

  시간 또한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호작용’의 개념으로 바라보자. 시간의 흐름의 측면에서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이유는 내가 걸어 걸어 그 자리에 서있기 때문이다. 즉 나의 선택으로 나는 이 자리에 왔다. 반면 시간의 흐름이 아닌 관계성, 상호작용의 측면에서 온 우주의 관계에 의해 흘러 흘러 지금의 위치에 오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쏟은 물은 나의 실수가 아니라 주변 환경들과 관계 맺음을 통해 일어난 것이다. 자책하고, 슬퍼할 필요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양자역학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있다. 모든 것은 ‘상호작용’을 통해 일어나며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도 대입할 수 있는 부분이다. 

  ‘통섭’은 ‘서로 다른 것을 한데 묶어 새로운 것은 잡는다.’는 의미의 한자어이고, 통섭을 뜻하는 라틴어 ‘consilience’는 ’함께 넘나 든다.‘는 뜻이다.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을 연결하고자 하는 통합학문 이론이며 지식의 통합을 뜻하기도 한다. 이는 점차 많은 사람들이 통섭에 관심을 갖고 문과생이 과학서적을 읽는 연유일 테다.

홍서희 학생 
독일어문학전공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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