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의 명동과 오늘의 명동은 엄청나게 달라져 버렸다. 
이십 년 동안에 그 분위기가 빚어낸 풍물과 모습들로 인해 변화가 무쌍했다. 
해방 직후부터 명동은 예술가들의 ‘살롱’이 되어 꿈과 의욕 속에 설레던 지역이었으나 
이제는 잠시 인사차 들러 보는 곳으로 인연이 멀어져 가는 이방지대가 되어 가고 있다.” 
-<그리운 이름 따라-명동 20년> 中-

강산도 10년이면 변한다. 하물며 40여 년이란 시간 앞에 바뀌지 않는 장소가 있을까. 명동도 마찬가지다. 1930년대 명동은 ‘메이지마치(明治町, 명치정)’라 불리던 일본인 거주지였다. 하지만 광복과 전쟁, 그 후 전후재건과 경제성장을 거치며 1970년대까지 명동은 수없이 변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묵묵히 목격하고 기록한 사람이 있다. ‘명동백작’, ‘명동시장’이라 불리며 명동을 지켜왔던 사람. 명동의 진정한 백작, 소설가 이봉구의 심향(心鄕), 중구 명동으로 향했다.

  명동 한복판에 위치한 ‘은성주점 터 표지석’. 이곳에서 문학을 얘기하고 예술을 건 네던 시절이 있었다.

  기울이던 술잔에 담긴 품위
  남산 위로 노을이 걸릴 즈음, 이봉구의 자취를 찾아서 명동에 도착했다. 이곳에 ‘명동백작’의 삶이 녹아있으리라. 관광객이 자리를 비워 공허한 명동엔 인공 불빛만이 춤추고 있었다. 그의 흔적을 찾으러 발걸음을 옮기던 중, 주변 상점과 어울리지 못하는 비석이 눈에 띈다. 한 가게 앞에 ‘문화·예술인이 찾았던 은성주점 터’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봉구를 논할 때 ‘은성주점’을 모른다면 ‘이봉구 문외한’이라 할 수 있다. 은성주점은 1960년대 탤런트 최불암 씨의 모친인 이명임 여사가 운영하던 술집이다. 이봉구는 ‘은성의 풍경화’라 불릴 정도로 매일 은성주점을 드나들었다. 그가 명동백작이라 불린 이유도 여기서 보여준 술자리 예절 덕분이다. 항상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우아한 백작처럼 술자리를 마무리했다고 전해진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매각후 사무실로 사용되던 건물을 재매입해 명치좌 시절 모습으로 복원했다. 현재는 ‘명동예술극장’으로 재탄생해 다양한 연극과 공연이 상연되고 있다.

  예술인의 쉼터 예술극장
  어둠이 짙어진 명동에서 이봉구의 두번째 흔적을 찾아 떠났다. 각 잡힌 신식 건물 사이로 바로크 양식 건물이 우두커니 위치하고 있다. 명동예술극장이다. 명동예술극장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일제는 1936년에 건설한 이 건물을 ‘메이지자(明治座, 명치좌)’라 칭했다.
‘시공관 앞은 연극을 보러 오는 수많은 사람으로 물결쳤다.’ 이봉구가 소설 『그리운 이름 따라-명동 20년』 속 명동예술극장을 묘사한 장면이다. 광복 후 명치좌는 ‘시공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그 시절, 명동예술극장의 인기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961년 시공관 이전 후 명동예술극장은 명동국립극장이 됐다.

  현재는 ‘명동예술극장’이 돼 대한민국 공연예술의 산실로 보존되고 있다. 건물 주변을 서성이니, 마치 과거 문화·예술인의 아지트를 방문한 기분이다. 이봉구는 명동예술극장이 ‘명치좌’라는 명칭으로 불릴 때부터 ‘명동국립극장’으로 사용했던 시절까지 변화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이봉구가 명동을 지켰던 세월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약 120년 동안 명동을 대표해온 명동성당. 명동을 거닐던 문화인에게 위로를 전하고 있다.

  명동을 지켰던 ‘노블레스 오블리주’
  명동에 담긴 백작의 이야기가 막바지에 진입했다. 달빛에 젖어가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명동성당에 다다랐다. 웅장한 고딕 양식의 성당이 빛을 내며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봉구는 여러 작품에 명동성당을 담았다. 소설 『그리운 이름 따라-명동 20년』, 수필 『明洞, 비 내리다』 등 명동을 대표하는 건축물로서 성당이 등장했다. 명동성당과 이봉구는 오랜 기간 명동을 함께 보살피던 동지였다.

낮보다 더 빛나는 명동의 밤. 원색의 불빛이 거리를 뒤덮었다.

  문화가 저물어간 명동  
  1974년을 끝으로 명동백작은 더이상 명동 거리에 나타나지 못했다. 고혈압으로 쓰러져 수유리로 투병 생활을 떠났기 때문이다. 백작의 은퇴와 더불어 명동에는 증권회사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명동예술극장 건물도 매각돼 2003년 다시 매입하기 전까지 예술인의 곁을 떠났다. 그렇게 명동은 문화·예술인의 거리에서 멀어져갔다. 이봉구에게 명동은 어떤 장소였을까. 한승우 교수(다빈치교양대학)는 “이봉구에게 당시의 명동은 전쟁 직후, 가난한 현실 속 예술인의 애환이 담긴 공간이에요. 그는 명동에서 자신과 똑 닮은 동료 예술인을 보며 동질감을 느끼고 서로를 위로하고 공감했어요.”고 전했다.

  이봉구의 흔적 찾기는 이렇게 종결됐다. ‘은성주점 터’ 뒤로 예술을 논하던 이봉구의 눈빛이 반짝이는 듯하다. 언제나 밤에 더 빛나는 명동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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