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백(Aside)은 연극 용어로 ‘인물이 관객에게 하는 말’을 의미합니다. 인물의 곁에서는 듣지 못하기 때문에 오직 관객에게만 들리는 말이죠. 사회를 하나의 무대로 본다면 어떨까요. 이번 학기 중대신문 사회면은 우리 사회라는 무대 위, 누구도 들어주지 않아 방백을 할 수밖에 없던 인물들을 조명하려 합니다.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이 극의 관객이 되어주시겠습니까? 응하셨다면 이번 주는 “기초생활보장제도에 관한 방백”으로 열어보려 합니다. 끝까지 꼭 자리를 지켜주세요. 이제 시작합니다.

  고민주 기자 minjoo@cauon.net

아픔을 증명해야 살아남는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늪
상처가 덧나야만 하나

 

※ 본 기사는 「기초생활보장제도 자활사업 참여자 인터뷰 조사」(빈곤사회연대·홈리스행동·한국도시연구소, 2019)와 「기초법 20년, 평가와 과제 토론회」(더불어민주당 김민석 국회의원 외 9명, 2020)에 기록된 인터뷰를 바탕으로 각색했습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해당 문장은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일부 대사다. 위 영화에서, 목수였던 다니엘 블레이크는 심장병으로 일을 그만둔다. 그는 실업 급여를 받으러 관공서를 찾아갔지만 복잡한 절차 때문에 신청하지 못하고 좌절한다. 이런 저소득층의 상황은 영화에 그치지 않는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기초생활보장제도)는 저소득층의 최저생활보장을 목표로 제정됐다. 하지만 제도의 문제점으로 되레 빈곤을 의심받고 증명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류 제출, 미지의 굴레
  여러 개의 신용카드로 생계를 유지했던 A씨는 기초생활보장제도의 혜택을 받기 위해 주민자치센터를 찾았다. 제도의 도움을 받으면 삶이 나아지리라 예상했던 A씨는 또 다른 벽을 마주했다. 담당자가 수급 결정을 위해 통장명세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생활비로 사용했던 카드가 총 11개예요. 돈이 없어서 카드를 돌려 막기 하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했죠. 그러다 보니 11개의 카드 명세를 다 보여줘야 하는 상황인거예요. 심지어 카드 사용 기간이 길면 명세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면 본사까지 직접 방문해서 내용을 증빙해야 한다니까요. 가야 하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니 교통비도 부담이네요.”

  기초생활보장제도는 급여신청 시, ‘사회보장급여신청서’와 본인의 ‘금융정보제공동의서’를 필수 서류로 정한다. 이와 더불어 급여 선정과정에서 제적등본, 신분확인서류 등이 필요하면 보장기관은 수급신청자에게 제출을 요청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수급신청자들은 이보다 더 많은 서류를 요구받는다.

  정성철 빈곤사회연대 활동가는 방대한 제출서류가 수급신청자들에게 주는 부담을 이야기했다. “금융정보제공동의서 서명으로도 조회할 수 있는 서류를 수급신청자가 직접 제출하도록 안내하고 있어요. 과도한 서류 제출은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신청의 장벽이죠.”

  제도 신청의 발판은 부서졌다
  
사고로 시각장애인이 된 B씨는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을 신청하기 위해 활동보조인과 시청을 방문했다. 하지만 점자 안내서가 존재하지 않아 활동 보조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담당 공무원의 설명도 오롯이 음성으로만 전달되니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점자 안내서가 있었으면 직접 읽어보고 생각할 시간을 가졌겠죠. 하지만 점자 안내서가 비치돼 있지 않아, 활동 보조인이 읽어주는 내용만으로 수급을 받을 수 있는지 판단해야 했어요.”

  올해로 노년기에 접어든 C씨도 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신청을 위해 시청을 찾았다. 제도 안내서를 펼쳤지만,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안내서에 복잡한 법률 용어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설명을 들으면 나아질까하는 마음에 담당 공무원에게 부탁했지만 마찬가지였다.

  “담당 공무원이 어려운 법률용어를 계속 말하더라고요. 알려주지 않은 법률용어로 기초생활보장제도를 설명하니까 이해하기 막막할 수밖에요.”

  400페이지가 넘는 기초생활보장제도 사업안내서 안에는 법·제도적 전문용어들이 즐비하다. 이는 수급권자와 보장기관 간의 정보의 비대칭을 형성하고 수급권자의 권리 획득을 방해한다.

  아픈 곳을 들쑤셔야만
  정부는 올해 발표한 ‘제2차 기초생활보장종합계획’에서 생계·주거·교육 급여에 대한 부양의무자 기준을 폐지했다. 하지만 의료급여는 제외됐다. 부양의무자란 수급신청자와 주거를 달리하고 있는 1촌 내 직계혈통 및 배우자를 말한다. 수급신청자의 소득과 재산이 선정기준 이하일지라도 부양의무자가 해당 기준 이상이면 수급자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수급신청자는 수급자가 되기 위해선 본인의 부양의무자로부터 부양받을 수 없음을 지속해서 증명해야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D씨는 수급을 신청했지만 선정되지 못했다. 10년 전, 남편과의 이혼으로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딸이 부양의무자로 지정됐기 때문이다. 담당 공무원은 D씨가 수급혜택을 받기 위해선 ‘금융정보제공동의서’와 ‘가족관계단절 사유서’를 딸에게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가족해체라는 신고 서류절차가 있더라고요. 수급자가 되려면 그 서류를 딸이 직접 작성해야 한다네요. 이거 작성할 때 우리 딸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요. 그럴 바에는 신청 안하고 그냥 밖에서 노숙하겠다고 했답니다. 이런 절차가 가슴을 아프게 하죠.”

  저소득층은 저학력, 장애 등의 특징을 지닌 경우도 존재한다. 하지만 현재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이런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따라서 상당수의 신청자가 서류 마련에 어려움을 겪는다. 『극빈과 인권에 관한 유엔 특별보고서』는 서류 신청 과정에서 과도한 조건이 부과되는 것을 ‘빈곤의 형벌화’로 분석했다. 기초생활보장제도가 지나친 자격요건과 조건을 부과함으로써 국가는 빈민을 처벌하고 수치심을 주며 빈민이 당면한 상황을 악화한다는 것이다. 

  정성철 활동가는 가난을 입증해야 도움받을 수 있는 수급신청자의 현실이 수급 포기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과도한 증명 책임이 수급신청자에게 요구되는 상황이에요. 이는 수급신청자가 기초생활보장제도를 권리로서 보장받는다고 느낄 수 없게 만들죠. 수급신청을 포기하게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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