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캠 후문 쪽에서 유기견들이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무리 속 개들의 야생성은 놀라웠다. 대장 역할을 하는 개가 다른 유기견 무리들과 충돌했을 때 드러냈던 날카로운 이빨이 특히 강렬했다. 유기견들 무리는 지금은 사라졌다. ‘동물보호센터’ 같은 곳에서 포획해 격리했으리라 생각한다.

교정 곳곳에서 ‘중냥이’(중앙대 고양이)들을 발견한다. 활동 영역에 따라 대학원냥이들, 법냥이들, 서라벌냥이들, 정문냥이들이라고 부른다. 학생들은 각각의 고양이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 공유하기도 한다. 유기견들과 달리 고양이들은 대학 구성원들과 공존의 길을 찾아낸 듯하다. 그 과정에서 ‘길고양이 돌봄 동아리’인 ‘냥침반’이 큰 역할을 했다. ‘냥침반’은 2016년부터 꾸준히 대학 구성원들과 소통하며 중냥이들에게 급식을 제공하고, 쉼터를 만들고, 중성화 수술을 해왔다.

  대학 캠퍼스에서 왜 개는 배제되고, 고양이는 포용되었을까? 개는 관계를 맺는 방식이 위계적이고, 고양이는 수평적이다. 인간과의 관계에서도 개는 순종적인데, 고양이는 무관심성이 강하다. 무리를 지었을 때, 공격적이냐 회피적이냐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권력이 비대칭적으로 인간에게 쏠려 있다. 인간은 자신이 조성한 공간에서 배제와 포용의 공간 권력을 행사한다. 고양이가 자신의 종(種)의 경계를 넘지 않은 상태에서 캠퍼스에 있는 것은 괜찮다. 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종의 경계를 이탈하는 순간 관용은 없다. 개가 늑대가 되는 순간, 혹은 고양이가 살쾡이가 되는 순간 인간은 학살을 자행한다.

  반려견·반려묘는 인간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반려종 선언』(도나 해러웨이 씀)에 주목하게 된다. 페미니스트 이론가인 해러웨이는 근대 서구 사회가 ‘반려종’의 품종으로 나눠 인종주의적 관점을 은연중에 정당화했으며, 인간의 생명권력과 생명정치 속에서 반려종에 대한 식민적 지배가 지속되었다고 했다. 해러웨이는 인간과 반려종이 “함께 잘 지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관계, 이제까지와는 다른 미래를 만들 수 있는 ‘동사(動詞)적 관계’가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해러웨이의 문제의식을 따르자면, 인간은 반려종을 대할 때 인간이 먹이를 준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를 ‘엄마’로 생각하는 관점을 거부해야 한다. 다 자란, 심지어는 2세까지 낳은 반려종을 아이 취급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다. 인간은 먹이를 주면서 관계를 맺기를 원하는 존재가 아기인지 반려종이라는 존재인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중냥이의 눈에 비친 인간은 어떤 모습일지를 상상하고, 자신의 행위를 성찰하는 것이 ‘반려종 선언’의 핵심적 문제의식일 것이다. 인간은 자기 중심으로 반려종을 대해왔기에, 반려종의 관점에서 스스로를 상대화하는 성찰적 태도가 중요하다. 인간은 오만하지만, 그저 지구의 반려종일 뿐이다.

 

오창은 다빈치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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