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무와 일출이 연출하는 다홍빛 하늘이 아름다운 한진포구의 모습. 등대는 밀물이면 바닷속으로 점차 잠긴다. 동혁과 영신이 거닐던 바닷가는 현재 공단이 들어서 밤이면 화려한 조명을 비춘다.

누구든 가장 편안한, 나를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경제적 어려움과 도시에 대한 환멸은 예술가 심훈의 낙향을 이끌었다. 1932년, 그는 부모님과 조카 심재영이 거주하고 있는 농촌으로 몸과 마음을 옮겼다. 지칠 대로 지친 심훈을 위로했던 심향(心鄕), 충청남도 당진시로 향했다.

  당신과 속삭이던 밤 포구에서
  이른 새벽 고요함을 깨는 고동 소리에 밤 낚시꾼이 하나둘 모여드는 한진포구에 도착했다. 심훈의 자취를 찾기엔 안성맞 춤인 출발지다. 자욱한 해무와 바다 건너 공단의 불빛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지새려는 봄밤, 잠 깊이 든 바다의 얼굴 을 휩쓰는 쌀쌀한 바람이 쏴-하고 또 쏴- 하고 타는 듯한 두 사람의 가슴에 벅차게 안긴다.’ 소설 『상록수』 속 ‘박동혁’과 ‘채영 신’이 바닷가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장면 이다. 두 인물이 밤 산책을 나서던 한진포 구는 심훈이 서울로 갈 때 자주 이용하곤 했다. 소설 속 배경인 ‘한곡리’는 한진리의 포구와 그의 조카 심재영이 사는 부곡리 를 합쳐 만든 지명이다.

  붓으로 문학을 일구듯
  어두운 밤을 끝내고 푸르른 상록수를 비추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태양이 떠오르 기 시작했다. 일출을 뒤로한 채 심훈기념 관으로 떠났다. 기념관에 도착하니 소설 속 주인공 ‘박동혁’과 ‘채영신’의 동상이 수 업 종을 울리며 맞이한다. 심훈기념관에 는 심훈이 머물던 필경사와 심훈의 유품 을 전시해놓은 기념관, 상록수 문화관이 위치한다. 필경사는 심훈이 직접 설계한 주택으로 붓 필(筆)에 밭갈 경(耕)을 써 붓 으로 밭을 일구듯 글을 쓰겠다는 각오로 지어졌다. 이곳에서 그는 소설 『직녀성』과 『상록수』 등 작품 집필에 매진했다.

  근처 심재영 고택으로 발걸음을 옮겼 다. 심훈의 조카인 심재영은 『상록수』 박 동혁의 참고 모델로 알려졌다. 걷는 도중 주변을 살펴보니 곳곳에 『상록수』에 일컬 었던 상록수가 우뚝우뚝 서 있었다. 전나 무부터 소나무와 향나무까지 심훈의 향기 가 녹음 사이로 진하게 퍼져 나갔다.

  7월의 바다를 느꼈던 외로운 섬
  필경사에서 서해를 바라보니 한 섬이 눈에 띈다. 행담도다. 심훈은 아산만에 있 는 섬에 다녀온 후 수필 『7월의 바다에서』 를 남겼다. ‘배는 아산만 한가운데 떠 있는 ‘가치내’라는 조그만 섬에 와닿았다. 멀리 서 보면 송아지가 누운 것만 한 절해의 고 도다’ 수필에서 묘사한 ‘가치내’의 모습이 다. 여기서 언급한 ‘가치내’는 행담도의 옛 이름이다. 심훈은 이곳에서 가난에 굴하 지 않고 꿋꿋이 성장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희망을 느꼈다. ‘그 어린 생명이 교목 과 같이 상록수와 같이 장성하는 것을 생 각할 때 한없이 쓸쓸한 우리의 등 위가 든 든해지는 것을 느껴지지 않는가!’

  사시사철 변하지 않을 꿈
  새로운 사업을 위해 1936년 상경했던 심훈은 장티푸스에 걸려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심훈에게 당진시는 어떠 한 의미였을까. 당시 농촌의 비참한 현실 과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청년지식인의 노력을 보며 그는 『상록수』의 기틀을 세웠 다. 박정희 문학평론가는 “심훈에게 당진 이란 농촌 현실의 목도하고 인텔리로서의 자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하는 공간이 었다”고 전했다.

  동트기 전부터 쫓았던 심훈의 발자취 는 이렇게 끝이 났다. 당진시를 뒤로한 채 바라본 바다에 햇빛이 반짝인다. 농촌계 몽을 꿈꾸던 둘의 아름다웠던 순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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