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나 있지만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대표자를 봐왔다. 여기서 말하는 대표자는 당장 중대신문부터 학생, 교직원 등 구성원을 둔 집단의 장을 말한다. 필자에겐 그가 굉장히 인상 깊었다. 그는 자기 앞길에만 급급한 경주마였다. 마치 모든 권리를 본인 손에서 쥐락펴락해도 되는 것처럼 자신의 권한과 권리를 과대 해석했다. 그래서인지 어떤 행위의 정당성을 모두 자신의 권리와 타인의 잘못에서 찾았다. 그를 통해서 깨달았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적어도 좋은 방향으로 쓰이기엔 틀렸다고.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파시즘이 남긴 최악의 유산은 파시즘과 투쟁한 사람의 내면에 파시즘을 남긴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군부정권을 내몰고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은 지 30년이 지났다. 이제는 우리가 뽑은 대표자의 결정이 옳지 않다면 광장에 모여 비판하고 요구하며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정치에만 한정해 얘기하는 말이다. 광장에서 흩어져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 사람들의 모습은 어떤가.

  우리가 마주한 일상은 폭력과 권위주의, 결여된 감수성으로 점철돼 있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하대하는 동료, 온갖 거들먹거림을 다하며 후배를 무시하는 선배,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사람을 배제하며 연대하는 군필자, 아랫사람을 탓하고 요구하지만 정작 본인은 되돌아보지 않는 상사. 당장에 주변 사람들, 내가 속한 집단만 봐도 민주주의를 얘기하기 힘들다. 일명 ‘감정 노동자 보호법’,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왜 시행됐겠는가. 광장의 민주주의는 절대로 일상의 영역까지 닿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우리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나타나야 한다. 일상에서 민주주의를 체감하며 습관처럼 익숙해져야 한다는 의미다. 일상적인 갈등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상생하는 법을 찾아가는 동안 우리의 민주주의는 발전한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민주주의다. 성숙한 민주주의가 자리 잡은 집단은 어떤 압력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권위주의에 한참이나 무감각하다.

  일상 속 권위주의와 폭력에 물음표를 던지지 못하고 답습하는 사람 중에선 자신은 깨어있는 시민이고 탈권위적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자신이 누리는 일상적 권리의 달콤함에 속아 잘못된 일상을 보지 못한다. 자신의 행실이 잘못됐다고 잠시 생각할 수도 있지만 편안함을 잃을까 두려워 미약하게라도 있던 물음표를 지우고선 안주한다. 이러한 현실에 비춰볼 때 민주주의가 이 나라에 존립한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무엇이 바뀌겠는가. 정치인에게 깨어있는 의식을 주문하는 것과 별개로 각자의 삶터에 있는 우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 선택을 늦출 이유는 없다. 민주주의는 광장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김강혁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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