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광부의 아들인 주인공이 아버지와 로열발레학교 오디션을 마치고 돌아설 때의 장면이다. 면접관이 아버지에게 건넨 한 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잘 해결되기 바란다는 한 마디, 아마 그에게는 자신과 다른 세상의 사람에게 들어본 첫 위로의 말이었으리라. 그 아버지는 아들 뒷바라지에 필요한 돈을 벌고자 파업 중인 동료들을 버리기로 했다. 가족과 친한 동료를 제외하면 광산 주변에서 마주치는 관리자와 경찰의 거친 언행이 더 익숙해서였는지, 혹은 아들의 오디션이 실패했다는 생각, ‘그럼 그렇지 광부의 아들이 무슨 발레야’라는 생각이 가득했던 아버지는 그 말에 잠시 멈칫한다.

 외부자인 감독이 그 면접관을 통해 주인공 부자에게 건네고 싶었던 말이었을까. 시간이 지나 제삼자의 시각에서는 영국 광부들의 싸움은 질 수밖에 없는 파업이었고, 폐광돼야 할 운명이었다. 오히려 기억에 남는 것은 면접관이 보여준 최소한의 예의, 동의 또는 동참하지 않더라도 공감하고자 한 행동이었다. 그 면접관은 발레 교육이라는 예술교육 분야에서 나름 전문가일 테고, 자신과 관련이 없고 사회적으로 시끄러운 탄광촌 출신의 가난한 부자에게 공감을 표시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영화에서 본 그 면접관의 태도를 떠올리니, 공감 능력이 없는 전문가 때문에 생기는 전문가 집단에 대한 대중의 비판과 냉소에 눈길이 간다. 전문가와 일반인의 간극은 전문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자기 분야에 초점을 맞추고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다 보니 관심 분야에 대한 인식은 매우 깊어지는 반면, 그 외 직간접적 경험의 범위는 좁아지기 마련이다. 물론 자기 분야에 심혈을 기울이는 전문가들이 있어야 우리 사회의 지식이 발전하고 축적되며, 합리적인 사회발전에 기여한다. 더군다나 미래사회에서 전문가의 역량이 더욱 중요해질 텐데, 전문성을 키우는 노력은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나 분야에 따라서는 전문가가 전문지식을 활용하면서 일반인과 관계를 형성하는데, 이때 비전문가인 일반인에 대한 전문가의 공감 능력의 결여가 문제가 되곤 한다. 전문가가 지식은 갖췄으나 타인을 대하는 인성이 결여됐거나, 사회의 일반적인 가치판단과 동떨어진 기계적인 판단을 내리고, 전문가들이 보편적인 이익보다 집단적 이해관계를 앞세운다고 대중에게 인식될 때 비판과 냉소는 극대화된다. 이는 결국 전문가뿐 아니라 전문지식에 대한 사회적 신뢰와도 직결된다.

 그렇다면 전문가를 지향하는 개인이 다양한 환경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성장 과정을 제공하면 될까. 하지만 이는 전문가 양성과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제공된다면 좋은 일이다. 우리가 겪는 전문가의 공감 능력 문제는 오히려 다양한 배경을 갖는 전문가들이 성장할 수 있게끔 하는 구조를 마련해 전문가 집단 차원에서 경험의 다양성을 제공하고, 네트워크의 폐쇄성도 완화할 수 있지 않을까.

정혁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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