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비평 부문 당선 : 장준영 학생(국어국문학과 4) 세상의 모든 형들에게, 혹은 여성적 후일담의 가능성

「디디의 우산」(황정은 펴냄)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

섹스를 꿈꿀 때조차 NHK판 광주 비디오를 떠올리는 시대, 그런 시대를 살았다는 희미한 기억뿐인 것이다.
 
  추억은 추억이고 열사는 죽었으니 열사이고 일상은 일상이니 삐삐는 울려대는 것이다.
 
  후일담 문학은 통상 ‘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의 경험을 문학 화한 작품들을 지칭한다. 80년대의 민주화를 경험하고 90년대에 활발히 저작 활동을 했던 60년대생 작가들. 양귀자, 공지영, 김영하, 최윤, 박일문, 김영현 등은 후일담 문학의 대표 저자로 거론되는 소설가들이다. 이들은 ‘고문의 시대’였던 80년대를 기억하고 극복하는 시대적 소임으로 작품 활동을 했다.
 
  양귀자의 중편 소설 「숨은꽃」의 서술자는 “운 좋게 부산물을 획득하던 시대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는 한편 “좌표가 있던 자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닌데 왜 그렇게도 맥이 풀려버렸을까.”라고 소회한다. 이 목소리는 90년대를 맞으며 당대의 많은 작가들이 느꼈을 환멸을 대변한다. 그것은 잔혹한 물고문과 구타를 견디면서까지 지켜냈던 가치가 쟁취된 후에 돌아보니, 자신들이 고통을 원재료로 소설을 써왔음을 깨닫는 아득함이었다.
 
  한편 공지영의 『고등어』는 80년대에 대학생 운동권이자 소설가 지망생이었지만, 90년대 초엔 기업 회장의 자서전을 쓰는 인물로 전향한 경식의 목소리를 빌려 허망함을 표현했다. 경식이 학창 시절의 투쟁 동료인 은림에게 늘어놓는 푸념은 당대를 지나온 이들의 공유된 목소리라 보아도 무방하다.
 
  정재림은 ‘제대로 잊기 위해서는 제대로 기억해야만 한다’는 ‘시모니데스의 기억술’을 인용하여 90년대 후일담 문학의 창작배경을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후일담 문학은 80년대의 끔찍한 기억들과 죽음들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후일담 문학은 혁명도 죽음도 완수하지 못한 문학흐름으로 평가받게 됐다. 정재림은 후일담이 ‘추억담’의 형태로 쓰인 점을 실패의 원인으로 뽑았다. 그는 90년대의 후일담 문학들은 80년대를 기억함으로써 망각하려 했지만, 후일담 문학이 당대를 ‘절망의 포즈’와 ‘엄살의 몸짓’으로 기억하려 한 탓에 정작 80년대의 현실이 작품에 담기지 않았다고 짚었다.
 
  그렇다면 후일담 창작자들은 어떤 문학적 수행으로 애도를 시도했는가?
 
  추억담의 엔트로피
 
  90년대 후일담 문학은 갑작스럽게 종결된 80년대의 기억들을 천천히 되새기는 과정이었다. 양귀자의 경우 그것은 ‘앞으로 어떤 글을 쓸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되었고, 공지영의 경우엔 80년대의 운동의 의미를 환멸의 구렁텅이에서 구제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하지만 위의 두 시도를 비롯하여 90년대의 후일담 문학의 귀결은 끝내 시대를 아퀴 짓지 못했다.
 
  내가 베가르기를 처음 본 것은 대학교 이학년 때, 그러니까 87년 5월의 어느 봄날이었다. (중략) 전경과 학생, 모두가 하얀 소복의 그녀를 보고 있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중략) 그 장면은, 집회를 기획한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참으로 색정적이었다.
 
  김영하의 단편 소설 「전태일과 쇼걸」과 「베를 가르다」에는 80년대의 기억이 담겨있다. 거리와 캠퍼스의 기억은 살아남은 자들이 당대를 추억하는 방식으로 기술되었다. 김영하에게 80년대는 지고한 가치를 위해 투쟁했던 때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훌륭한 이야깃거리였다. 소설의 몇 대목에서는 서술자의 관음증적인 태도도 확인할 수 있으며, 남성인 서술자가 혁명의 (여성)동지에게 섹슈얼한 코드를 대입하는 장면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러나 두 작품에선 정작 시대의 담론과 구호는 제창되지 않는다.
 
  공지영의 후일담 기술방식도 살아남은 자들의 추억담이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공지영의 작품들은 김은하의 분석처럼 “혁명기의 여대생들이 어떻게 정치적 주체가 되어갔는가에 대한 문학적 증언”이라는 의의를 가진다. 하지만 공지영의 후일담 서사에 묻어있는 짙은 센티멘털리즘은 그의 소설이 애도의 방식이 아닌 ‘소재 이용’에 머물러있음을 방증한다.
 
  엔트로피 법칙은 한번 에너지로 전환되어 사용된 자연 물질은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 쓸모없게 되는 현상을 정의했다. ‘망각을 위한 기억하기’의 일환으로 창작되었던 90년대 후일담 문학들은 80년대의 기억을 끌어와 소설로 만들었지만 정작 애도에는 실패했다. 한 편의 작품으로 타오른 기억은 다시 회수되지 않는 어딘가로 아득히 넘어가 버린 듯하다. 80년대의 혁명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을지 모르지만 끝내 완수되지는 못했고, 그렇게 80년대는 90년대로 이행되었다.
 
  침잠하는 후일담
 
  지금까지, 후일담 문학이란 용어는 마치 90년대 소설의 전유물인 것처럼 논의되어왔다. 하지만 한 시대를 되새기고 기억하는 방식이 문학(소설)의 기본 속성이기도 하다는 점, 그리고 1930년대 카프 해체 이후 쏟아진 일련의 전향문학을 최재서가 ‘후일담 문학’이라 지칭하며 용어가 시작된 점을 돌이켜본다면 후일담 문학이 결코 90년대 초의 몇몇 작품들에만 귀속된 구분명이라고 할 수는 없다.
 
  손홍규와 김연수는 바로 다음 세대의 후일담 소설 창작자라 부를만한 작가들이다. 그들은 80년대 운동권과는 거리가 있는 70년대 생 소설가들이며, 2000년대에 주로 활동한 작가들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거리의 기억은 있다. 90년대 중후반의 대학 등록금 투쟁과 연세대 한총련 사태 등이 그것이다. 그들은 캠퍼스의 투쟁이나 노수석의 죽음 등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으며, ‘독재는 끝났는데 왜 아직도 시위를 하느냐?’라는 질타를 들으며 대학생활을 했다. 하지만 손홍규와 김연수는 앞의 작가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후일담을 풀어냈다.
 
  1986년의 캠퍼스라면 어디서나 규범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젊은 욕망들로 가득했다. (중략) 그는 교문에서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길만 밟고 다녔다. 그는 여전히 동서고금의 연애소설 속에 들어 있는 문장들을 통해 위안을 받았다.
 
  유리창은 간헐적으로 흔들렸다. 폭음이 일때마다 방을 보호하듯 그렇게 떨었다. (중략) 그는 바깥 세계를 눈이 아닌 귀로 관람했다. 그는 바깥을 거대한 수족관으로 혹은 바다로 상상했다.
 
  김연수의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과 손홍규의 「마르께스주의자의 사전」은 학교 밖과 학교 안을 구분 지으며 시작된다. 학교 밖은 투쟁의 공간, 누군가가 잡혀가거나 죽어가는 공간인 반면, 학교 안은 ‘겁먹은 개인’의 공간이자 침잠의 공간이다. 따라서 두 작품도 시위대의 구호는 노출하지 않는다. 대신 대학 안에서 비겁자처럼 몸을 웅크리고 내면에 골몰하는 개인만이 그려냈다.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의 서술자는 공책의 표지 뒷면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용기다.”라는 릴케의 말을 적어놓는 인물로, 리얼리즘 소설과 참여적 작품들이 주류이던 그때에도 로맨스 소설을 창작하는 작가지망생으로 그려진다. 또한 그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 강박적으로 몰입하는데, 이런 태도 역시 끔찍한 기억들로부터 도망치려는 의지의 발현이다.
 
  「마르께스주의자의 사전」(이하 「사전」)의 ‘그’도 실내의 인물이자 공동체와 유리된 존재다. ‘그’는 ‘나’를 찾기 위해 1996년 한총련 사태로 고립된 연세대학교에 잠입하는 등 적극적인 면모를 보이나 정작 이학관에 진입한 후엔 다시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또한 ‘그’는 사전을 통째로 씹어 삼키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설산」의 서술자가 『왕오천축국전』에 집착했던 것과 유사하다.
 
  김연수와 손홍규의 작품들은 밀폐된 공간 안에서 서술자의 내면으로 깊게 침잠하는 서사를 택했다. 작품들은 역시 ‘망각하기 위한 기억술’의 연장선에 있지만 90년대 후일담 문학들과는 달리 ‘우리’보다는 ‘나’의 형성에 집중했다. 이는 소위 환멸의 시대였던 90년대를 그리기 위해 80년대를 ‘아름다운 추억’의 형태 혹은 이야깃거리의 형태로 소환했던 90년대 후일담 문학과 2000년대 문학이 구분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2000년대 후일담 소설 역시 애도의 양식으로는 부적합했다. 90년대 후일담이 살아남은 자들의 죄책감을 낭만성과 비장함 등으로 포장했다면 2000년대 후일담의 인물들은 집단에 융화될 수 없었던 개인을 그리면서 거리의 기억들과 멀어졌다. 그렇다면 90년대와 2000년대의 후일담은 왜 시대를 갈무리하는 데 실패했던 것일까?
 
  열사는 숭고하고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숭고의 미감에 대해 논했다. 그에 의하면 숭고는 그 자체로는 흡족한 것도 아니며 매력 혹은 유희하는 상상력과 직결되지 않으나, 경탄 내지 존경을 함유하는 방식으로 쾌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소극적 쾌’에 해당한다.
 
  여기서 경탄 내지 존경을 일으키는 대상은 우리의 인식력을 뛰어넘을 정도로 거대한 무엇이거나, 인간을 한없이 약한 존재로 만들 만한 위력을 품은 자연이다. 칸트는 전자를 수학적 숭고로, 후자를 역학적 숭고로 구분했다. 숭고로부터의 취미판단은 우리의 인식능력의 이성적 규정이 감성의 최대의 능력보다 우월함을 우리에게 명료하게 하는 데서 발생한다.
 
  말하자면 숭고의 미감은 결국 자신의 이성적 규정이 이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깨달은 만족감인 셈이다. 칸트는 숭고한 대상 앞에서 우리들이 자연의 절대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우리 안에서 들춰낸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 모든 취미판단에는 전제가 제시된다. 그것은 숭고의 대상으로부터 자신의 몸과 정신이 안전할 것이란 약속. 즉 무관심 판단을 가능케 하는 ‘미학적 거리’다.
 
  글을 열며 인용한 『고등어』의 한 대목에는 “추억은 추억이고 열사는 죽었으니 열사고...”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것은 죄책감의 고백인 한편 살아남은 자들과 열사를 구분지음으로써 ‘죽음과의 거리두기’를 시도하는 태도이다. 이런 태도 속에서 열사의 죽음은 혁명에서는 핵심적일지 몰라도 자신과는 무관한 것이 된다. 90년대 후일담 문학이 추억담에 그친 것도 ‘거리두기’의 기술방식 때문이었다. 혁명과 죽음 이후 남은 자들의 실천은 미미하거나 비틀렸고, 작품 속에서 구호는 삭제됐다. 손홍규와 김연수의 작품에서도 인물들은 현장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일종의 무관심 판단을 수행하고 있다. 90년대와 2000년대의 후일담 문학들은 그들의 죽음으로부터 미학적 거리두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 속에서 열사들의 죽음은 수거되지 않았고 오직 이야깃거리로 소비되었다.
 
  구출과 구축, 여성적 후일담의 수행
 
  용산참사와 세월호 사건, 민중총궐기, 촛불 혁명 등을 거친 2010년대엔 새로운 작가군에 의해 또 다른 후일담 문학이 창작되고 있다. 그중 최은영의 중편 소설 「몫」과 황정은의 연작소설집 『디디의 우산』은 이전 세대의 후일담 문학과는 명확히 다른 태도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디디의 우산』은 세월호 1주기 때의 시청 앞과 광화문 인근의 기억을 담고 있으며, 「몫」은 90년대 말 교지편집부의 분위기와 기지촌 여성 강간ㆍ살해 사건을 다루었다. 「몫」은 이미 김은하, 이광호 등에 의해 후일담 문학으로 호명된 바 있다. 김은하는 「몫」을 다시 쓰인 여성후일담으로 보았고, 이광호는 이를 애도의 서사로 분석했다.
 
  황정은과 최은영의 소설은 이전의 후일담 창작자와 다른 태도로 쓰였다. 「몫」은 ‘글을 쓰는 행위’가 과거로부터 어떤 가치들을 구출해내야 하는지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몫」은 정치와 거대담론 속에서 덜 중요하다 여겨진 것들의 증언이다. 따라서 「몫」의 서술자와 희영은 ‘글을 쓰는 행위’를 도구로 활용한다. 이 지점은 독특한데, 무엇을 써야 할지 알 수 없어 여행을 떠나야 했던 양귀자나 『무협 학생운동』을 썼던 김영하와는 구별되기 때문이다. 최은영의 경우, 꿈틀대는 ‘새 담론’의 필요를 절감하여 글쓰기를 자신의 ‘몫’으로 여기고 있다. 여기서 새 담론은 남성중심적이었던 90년대 운동권 내에서 중성화되어야 했던 여성들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다시 개인을(여성을) 되돌려주는 일이자 젠더 평등에 대한 열망이다.
 
  희영은 몇 년 전 B대학교에서 일어난 교수 성희롱 사건을 분석하는 글을 쓰겠다고 했다. (중략) 지면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더 중요한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 그 주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견이었다.
 
  희영은 편집회의 때마다 매번 여성의 인권과 젠더 평등에 관한 꼭지를 맡겠다고 주장한다. 그때마다 그 의견이 부딪히는 반대의견은 일정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안에 지면을 할애해야한다는 것. 시류를 읽으라는 충고. 말하자면 ‘페미니즘이 먼저냐, 민주화가 먼저냐?’식의 폭력적인 질문에 둘 중 하나만을 골라 답해야 하는 상황이다. 앞서의 질문에서 페미니즘이 먼저라고 답하는 것은 민주화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분법의 시대. 동지가 아니면 적이고, 민주화가 아니면 모두 독재인 시대. 1990년대 대학가는 여전히 팔루스중심주의적(Phallocentric) 사고체계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 속에서 운동권 여성들은 가부장 사회에서의 여성성을 거부하기 위해 중성화되어야 했다.
 
  “형. 우리 학교 여자애들 보셨어요? 계집애들처럼 몰려다니면서 선배보고 오빠라고 하질 않나. 우리 노래패도 단단하게 이끌어줄 남자애들이 안 들어와서 결국 이렇게 된 것 같아요.”
 
  “너도, 우리 후배라면 그런 여성적인 태도는 좀 버려야 할 것 같다? 말투도 그렇고 옷차림도 그렇고... 나도 여자지만, 사회에 나와 보면 참 융화가 안 되는 여자들이 많아. (중략) 우리 대학 여자들이 좋다는 게 뭐야. 제 3의 성이잖아. 여자지만 다른 여자들의 열등함은 지양해야지.”
 
  김은하는 여성이 혁명가가 되는 과정이 개인의 금욕주의적 수련의 성격을 띠며, 운동권 가부장이 여성지식인들을 부르주아적인 세계로부터 분리시켜 민중 친화적인 ‘누이’로 탈젠더화, 탈성화 하는 과정이라고 분석했다.
 
  ‘기지촌 여성 강간ㆍ살해 규탄 시위’에서 그동안 한 번도 관심을 주지 않았던 기지촌 여성을 ‘민족의 누이’로 호명하는 장면에선 여성성이 필요할 때에만 사용되는 도구였음을 엿볼 수 있다.
황정은의 중편 소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의 첫 대목은 작가가 시도하려는 것이 “누구도 죽지 않는 후일담 문학”임을 짐작케 한다. 이때 황정은이 지칭하는 ‘죽은 자’는 열사가 아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민주화의 담론장 내에서 그리고 모든 시위 현장에서 젠더폭력에 희생당해야 했던 여성 개인들을 의미하며, 또한 언론 등에 의해 의도적으로 평가절하 된 모든 의미 있는 행동들을 지칭한다.

 
  황정은은 누구도 죽지 않는 소설을 위해 그동안 증언되지 않았던 목소리들을 시대로부터 구출해낸다. 「아무 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1996년의 연세대 한총련 사태의 현장도 묘사했는데 이 부분은 같은 현장을 묘사했던 손홍규의 「사전」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어느 총련이야? 광주라고? 이 새끼들은 그때 씨를 말려버렸어야 했는데. 그때 뒈지지 않은 걸 후회하게 해주마. 너 저 안에서 씹했지? 몇 명 따먹었냐? 그는 폭력의 오금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페퍼포그와 안개비처럼 공중에서 쏟아지던 최루액 냄새, 굶주림과 목마름 (중략) 세수 한번과 양치 한번에 대한 끔찍한 갈망, 그리고 “보지는 어떻게 씻었냐 드러운 년들.”
 
  두 기억은 폭력에 대한 기억이란 점에서 얼핏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손홍규와 황정은은 같은 장면을 서로 다른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사전」은 당대의 민주화 담론이 어떤 종류의 국가 폭력에 대항해야 했는지를 우선적으로 떠올려냈다. 국가의 폭력은 학생 공동체를 향해 휘둘러졌다. 그리고 학생 공동체는 형제애로 유지되어온 남성적 집단이었다. 또한 손홍규의 소설에 등장하는 비하 발언은 그 목적이 단순히 욕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성(학생)에 대한 조롱 및 함께 있었던 여성들에 대한 도덕적 판단까지 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아무 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 기술된 전경의 폭언은 명백히 여성 비하이자 성추행이었다. 이는 ‘더 중요한 것’에 밀린 탓에 이전까지는 어느 후일담도 기록하지 않았던 내용이기도 하다.
 
  숨은 꽃의 꽃말 찾기
 
  惡女 OUT.
 
  (중략)
 
  ‘녀’가 빨간색이었다고.
 
  그리고 2016년의 광화문 광장. 언론과 정치는 150만 명이 모였음에도 불구하고 한 명도 연행되지 않았다는 데에만 집중했다. 언론의 카메라엔 오직 평화시위만 목격됐다. 상황은 20년, 30년 전과 똑같다. 하지만 2016년 말의 기억은 바로 이듬해에 여러 작가에 의해 수거되고 애도 되었다. 양귀자가 소설 「숨은 꽃」의 마지막 대목에 썼던 고민, 숨어 있는 꽃들의 꽃말 찾기가 시대와 나란히 수행되고 있는 셈이다. 강지희가 「몫」이 후일담 소설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쓰며 그 근거로 ‘소설 속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이 여전히 고스란히 동시대에 감당해야 하는 문제로 지각되며 육박해 들어오기 때문'임을 든 것은 일면 타당하다. 이는 그동안 후일담 문학으로 불렸던 작품들이 90년대에 창작된 것에 국한되어있었기 때문이며, 그 작품들이 과거를 다루는 태도와 「몫」의 그것이 상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일담 문학을 그저 ‘실패한 기억의 장르’로 국한시켜 90년대 문학을 이해하는 도구로만 사용하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다. 그보다는 더 낫게 기억하고 애도하는, 더 나은 후일담이 창작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태도의 변화가 ‘더 나은 후일담’을 가능하게 했으며, 앞으로도 가능하게 할 것인가?
 
  엘렌 식수는 그의 에세이 「출구」에서 여성적 글쓰기의 방식과 그 가능성에 대해 논했다. 그는 ‘중성적인’ 것으로 개념화되었던 양성성에 반反하는 또 다른 양성성을 제시했다. 이때 양성성은 어느 한 성의 차이도 배제하지 않는 것이며, 양성의 현존을 포착하는 것이다.
 
  엘렌 식수가 말하는 ‘영매되기의 양성성’은 대상과 나의 거리가 0인 상태를 의미한다. ‘영매 되기’는 대상에게서 숭고미를 느끼기 위해 필요했던 ‘미학적 거리’ 혹은 ‘무관심 판단’을 부정하는 개념이며, 어떤 사건을 소설로 옮기기 위해 필요하다 여겨졌던 ‘서사적 거리’ 또한 축소시킨다. 영매되기의 글쓰기에서 작가에게 요구되는 태도는 관람자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과 자신의 신변이 위협당하더라고 이해하겠다는 결심이다. 최은영의 「몫」에서 가정폭력의 희생자 여성의 이야기를 쓰던 ‘당신’이 “땀처럼 솟는 눈물을 닦으며 글을 쓰고,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의 마음에 붙을 수 있음을 깨닫는” 장면, 그리고 세월호 사건으로 희생된 아이들의 목소리로 생일시를 쓰려는 시도들은 ‘영매되기’의 글쓰기란 어떤 것인가 어렴풋이나마 보여주고 있다.
 
  죽음은 죽임 당한 사람이 더 이상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으니까 죽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대처는 절대적으로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하지만 누구도 죽음에 대한 대처를 강요할 수 없다. 죽은 자들에 대한 애도 역시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이어야 한다. 혹여 죽음을 숭고로 포장하려는 욕구가 생긴다면 차라리 글 쓰는 것을 멈추라. 그리고 죽음과의 거리를 철폐하라.
 
  문학비평 수장자 장준영 학생(국어국문학과 4) interview
 
장준영 학생(국어국문학과 4)

 

  오늘도 후일담 문학은 전진한다.
  흔히 후일담 문학이라고 칭해지는 지난 1990년대의 작품들에는 갑작스럽게 종결된 80년대의 기억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80년대의 기억은 시대 간 연결성 부족으로 추억에 침전됐다. 이러한 후일담 문학을 비평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한 장준영 학생(국어국문학과 4)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문학비평 분야 공모에 당선된 소감이 궁금하다.
  “너무 감사하고 행복해요. 많은 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글이 인쇄되는 일은 부끄러우면서도 언제나 신나는 일이니까요.”


  -비평문을 쓰면서 가장 신경 썼던 부분은.
  “선택한 주제와 텍스트에 가장 어울리는 비평의 언어가 무엇일지 고민했어요. 평소에 비평보다 소설 창작에 더 관심이 많아서인지 글에 은밀히 들어간 소설적 느낌을 중화시켜야 했죠. 또한 이번 글에서는 텍스트 자체를 분석하기보다 ‘후일담 문학’이라는 제재와 글의 흐름이 어우러지도록 글을 발췌해 넣었기 때문에 인용 부분이 너무 편협해지지 않도록 고심했어요.”


  -후일담 문학을 주제로 선정한 계기는 무엇인가.
  “몇 가지 문제의식이 존재했어요. 첫째는 용어적인 측면이었죠. ‘후일담’ 방식은 문학 장르의 공통 속성이에요. 하지만 그동안 후일담 문학이라는 명칭은 지난 1990년대에 창작된 일련의 문학작품에 국한돼 쓰여왔죠. 이는 후일담 작가들의 태도를 향한 가치평가를 내포하고 있어요. ‘후일담 문학’이라는 용어에 덧씌워진 오명을 벗기고 싶었어요.
둘째는 내용적인 측면이에요. 작품들의 공통점을 찾아 후일담 문학을 ‘살아남은 자가 기록한 문학’으로 정의해봤어요. 그 후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황정은 펴냄)을 읽고 시기별 작가들이 다루는 내용에 주목하기 시작했죠.”


  -후일담 문학을 지난 2010년의 동시대 문학범위까지 어떻게 확장시켰는가.
  강지희 작가의 「경계 위에서」라는 글을 통해 2010년대의 작품들을 후일담 문학에 적용시켰어요. 글 속에 ‘후일담’이라는 단어를 발견한 게 큰 계기였죠. 후일담이라는 구분이 동시대 문학을 읽어나가는 데도 동원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줬으니까요.


  -90년대, 00년대의 후일담 문학이 애도에 실패했다고 글에서 언급했는데.
  “실패 원인을 문학적 형상화 대상과 작가 사이의 ‘거리’에서 찾아봤어요. 살아남은 자의 문학인 후일담이 낭만적인 추억담 혹은 이야깃거리로만 창작되고 소비되는 건 불편한 일이에요. 그러한 문학은 공감과 이해의 결여 속에서 ‘나’라는 확고한 기둥을 세워둔 채 쓰이기 때문이죠.”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애도는 무엇인가.
  “기존 후일담 문학이 애도에 실패한 원인을 찾던 중 ‘영매되기의 글쓰기’를 발견했어요. ‘나’라는 확고한 주제 혹은 주장을 내려놓고 대상과 한몸이 될 정도의 혹독한 노력을 들이는 일을 말하죠. 황정은 작가가 『디디의 우산』을 열며 ‘아무도 죽지 않는 소설을 쓰고 싶다.’라고 묘사한 부분에서 태도의 진정성을 느꼈어요.
나아가 ‘영매되기’라는 표현에서는 ‘자발성’도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애도는 강요될 수 없기에 영매되기를 스스로 선택한 사람만이 애도를 수행할 수 있는 거죠.”


  -여성적 후일담 문학에 대한 본인의 생각은.
  “여성적 후일담 문학이 ‘여성의’ 후일담 문학이 아니란 점을 확실히 하고 싶어요. 애도의 문학에 ‘여성적’이라는 수식을 붙인 이유가 해당 작품들이 거대 담론과 집단주의 등 팔루스(남성)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니까요. 같은 맥락에서 여성적 후일담은 오히려 ‘여성의’ 후일담보다 좁은 개념이라고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의 여성적 후일담 문학을 바라보며.
  “'영매되기’를 선택할 준비가 된 작가들이 오늘도 열심히 글을 쓰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들의 작품을 기대하는 열렬한 독자이고 싶어요.”

  심사평 

  이경수 교수(국어국문학과)

  독창적 문제의식과 문학사적 감각이 돋보여
 

  누구도 이렇게 빠르게 다른 세상이 올 거라 예감하지 못한 시대가 열렸다. 불과 몇 년 전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인터스텔라>를 볼 때까지만 해도 어린아이들까지 마스크를 써야 하고 지구의 생존이 위협당하는 미래 사회가 당장의 우리 모습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비접촉이 생활화돼가는 시대에 인류 사회가 직면하게 될 위기는 무엇이며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공생할 수 있을 것인가. 앞으로 문학이 상상하고 성찰해야 하는 세상이 녹록지 않으리라 예감한다. 일상을 유지하기도 쉽지 않은 시절이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성찰의 시간도 깊어지고 있는 듯하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세 편의 비평문은 오늘의 문학에 대한 나름의 문제의식을 지닌 수준작이었다.
 

  윤채라의 「통증, 위로, 그리고 『파묘』」는 황정은의 단편 『파묘』를 분석한 비평으로 황정은 소설이 분노를 드러내는 방식에 주목한다. 간결한 문체가 던지는 묵직한 질문을 포착한 점이 돋보였으나 『파묘』에 대한 단편적 분석에만 그치고 있는 점은 아쉬웠다. 김주형의 「달콤쌉싸름한 유토피아」는 김초엽의 SF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대한 서평이다. 소수자, 정의,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김초엽의 소설이 구현하고 있는 세계를 분석하고 소개한다. 김초엽 소설의 매력을 잘 보여주는 글이지만 비평적 문제의식에서는 다소 아쉬움이 있었다. 장준영의 「세상의 모든 형들에게, 혹은 여성적 후일담의 가능성」은 최은영의 중편소설 『몫』과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을 중심으로 최근의 후일담 소설이 90년대, 2000년대의 후일담 소설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통찰하고 있는 글이다. 최재서의 명명에서 비롯된 ‘후일담 소설’이라는 말이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어떤 과정을 거치며 담론화 돼 왔는지 통시적으로 살펴보면서 후일담 소설에 대한 새로운 규정으로까지 나아가고자 하는 문제의식이 돋보였다. 동시대 소설에 대한 적확한 문제의식과 문학사적 감각을 두루 갖춘 수작이다. 당선자에겐 축하를, 본심에 진출한 모두에게 격려를 보낸다. 오늘의 우리 문학을 비판적 애정을 가지고 치열하게 읽으며 함께 성장하기 바란다. 여러분이 바로 한국문학의 미래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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