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잘 알려진 <흥보가>, <심청가>는 광주광역시에서 지정보호하고 있는 무형문화재로 남도판소리에 해당한다. 뿌리 깊은 소리의 고장인 남도에서 태어나 전통 소리의 뿌리를 잃지 않고 대중화에 앞장서는 이가 있다. 그에게는 밴드 활동을 하는 소리꾼, 전통 소리꾼, 창극 배우, 국악계의 아이돌 등 많은 수식어가 따라붙기도 한다. 바로 김준수 동문(전통예술학부 10학번). 소리와 함께 성장한 그를 만나봤다.

사진제공 김준수 동문
사진제공 김준수 동문

관객과 소통하는
헤어나올 수 없는
소리의 매력 속으로

대중과의 접점을
넓히기 위해 뛰어다니기

민초들의 애환이 담겨있는 판소리. 과거의 판소리는 편한 분위기 속에서 백성들이 마당에 앉아 즐기는 우리들의 대중음악이었다. 판소리의 위상을 되찾고자 노력하는 김준수 동문에게 소리는 인생의 동반자다. 그와 함께 늙어가고 있다는 그의 소리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판소리를 언제 처음 접했나.

  “초등학교 4학년 음악 수업 시간에 국악 동요 ‘도라지 타령’을 배웠어요. 국악 동요를 따라하는 제 모습을 본 담임 선생님께서 다른 친구들에 비해 국악의 시김새나 느낌을 정말로 잘 구사한다고 말씀하셨죠. 그렇게 선생님께서는 저를 전통 겨루기 대회에 학교 대표로 내보내셨어요.

  당시 대회 현장에서 판소리를 이미 공부하고 있던 다른 참가자의 소리를 듣게 됐어요. 그분의 소리를 듣고 ‘어 저게 무엇이지? 어떤 음악이지?’ 궁금했는데 판소리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처음 판소리를 접하게 됐죠. 조그마한 체구에서 에너지를 쏟으며 내는 그분의 판소리가 슬프고 애절했어요. 어렸을 때라 그분의 소리가 의미하는 바를 알지는 못했지만 음악으로서의 느낌이 가슴에 와닿더라고요.”

  -결정적인 계기였겠다.

  “맞아요. 그때 그 순간 ‘어 저 음악을 배워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부모님께 판소리를 하고 싶다는 말을 꺼냈어요. 처음에는 부모님께서 되게 의아해했어요. 부모님께 판소리는 너무나 생소한 장르였거든요. 부모님은 예체능보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기술을 배우든지 다른 길을 가기를 원했죠.”

  -부모님을 어떻게 설득했나.

  “부모님을 설득하는 데 담임 선생님 역할이 가장 컸어요. 담임 선생님께서 제 국악적인 재능을 알아봐주셨기 때문이죠. 선생님께서는 저를 소리의 길로 이끌어주는 조력자 역할도 해주셨답니다. 또한 저희 부모님도 직접 만나 ‘준수가 소리의 재능이 있다. 재능을 그냥 두기에는 아깝다. 이 길로 갔을 때 장래가 촉망하다.’는 말씀을 해주시기도 했죠. 그래서 저희 부모님도 저에게 믿음을 주시지 않았을까요.” 

  -본격적으로 판소리 공부를 어떻게 시작했는지 궁금하다.

  “제 고향은 전라남도 강진이에요. 조그마한 동네에 작은 학교를 다녔죠. 너무나 소학교다보니 여러 가지로 선생님들께서 직접 나서서 저를 도와주셨어요. 선생님께서 판소리 선생님을 수소문해서 찾아주시기도 했어요. 엄마 손을 잡고 그분을 찾아가 그때부터 정식으로 소리를 배웠답니다. 6학년 말 즈음에 판소리 선생님께서 자신의 스승님께 저를 보내주셔서 소리 공부를 쭉 이어왔어요. 처음 소리를 배울 때 기본기를 잘 잡아주신 선생님들께 너무나도 감사해요.”

  -산에 올라가서 연습을 하기도 했다고.

  “초등학교 때부터 선생님과 여름, 겨울에 합숙을 다녔어요. 산에 들어가서 20일 동안 합숙을 했죠. 합숙 기간 동안에는 밥 먹는 시간 빼고는 무조건 소리 연습만 해요. 그렇기에 산에서 소리 연습하는 시간은 저에게 익숙한 일상이에요. 소리를 하면서 거치는 당연한 과정이기도 하고요. 산 공부라 표현하죠.

  저희 집에서 얼마 떨어져있지 않은 곳에는 월축산이 있었어요. 월축산은 어찌 보면 저의 연습실이었죠.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산에 그늘진 곳 돌담에 앉아 북채를 두드리고 노래하기도 했어요. 지나가던 등산객들은 제 소리를 듣고 '무슨 소리야' 하면서 귀 기울이다가 앉아서 노래를 듣고 가기도 했답니다. 다행히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연습을 해도 누가 뭐라 하지 않았어요. 맘 놓고 산에서 소리 연습을 할 수 있던 그 때가 지금은 부럽기도 하죠.”

  -어렸을 때부터 판소리만을 쭉 해왔는데 슬럼프는 없었나.

  “고등학교 때 가장 크게 슬럼프가 왔어요. 부모님께서 농업을 하셨고 저희 집에서 예술하는 사람은 저 혼자였죠. 부모님은 어렵게 제 뒷바라지를 해주셨어요. 그런데 제가 예술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나서 경제적으로 힘들어진 순간이 왔어요. 소리하면서 가장 위기였던 순간이었죠. 하고 싶은 일은 소리였고 앞으로도 소리를 계속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을 때, 제 의지와는 다른 외부환경들로 인해 눈치가 많이 보였어요. 결국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소리 선생님께 가서 소리를 안 하겠다고 말했답니다. 그렇게 말하고 돌아선 뒤 2달 만에 다시 선생님을 찾아갔지만요.(웃음)”

  -2달 만에 소리 선생님을 찾아간 이유가 궁금하다.

  “2달 동안 그냥 학교만 다녔어요. 고등학교도 자퇴하고 빨리 취업을 하든가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답니다. 압박감에 쌓여 있었죠. 선생님들께서는 누구나 방황의 시절이 있을 수 있지만 이 시기를 지혜롭게 넘기면 잘 풀린다며 너는 소리만 열심히 하라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 말씀들이 당시 제게 무슨 소용이 있었겠어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어요. 어린 마음이었죠. 하지만 2달 만에 소리를 하러 선생님께 돌아갔어요. 소리 생각이 났기 때문이에요. 나는 소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강할 정도로 소리를 너무 하고 싶었어요.”

  -고등학교 졸업 후 중앙대에 입학한 계기는 무엇인가.

  “고등학생이 되면 어느 대학을 가야 할지 고민이 많잖아요. 저는 입시 시험을 볼 때 다른 학교는 도전하지 않았어요. 오직 중앙대 딱 1곳에만 원서를 넣었죠. 중앙대 전통예술학부의 커리큘럼이 너무 좋았거든요.”

  -전통예술학부의 어떤 커리큘럼이 마음에 들었는지 궁금하다.

  “판소리뿐만 아니라 무용도 배울 수 있는 커리큘럼이 좋았어요. 내 전공이 아닌 다른 전공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에요. 해보고 싶었던 창극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커리큘럼도 마련돼 있었죠. 소리를 하면서 제가 꿈꿔왔던 방향성과 중앙대가 잘 맞았답니다.”

  -중앙대에서 무엇을 가장 크게 배운 것 같나.

  “사실 대학 입학 전에는 대학에서 많은 분야를 배우기 때문에 마냥 좋다고만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너무 많은 분야를 배우다 보니 어렵기도 했죠. 이제까지 판소리만을 해왔던 저에겐 벅찼어요. 그래도 그 과정들이 여러 분야에 눈을 뜨게 해줬기에 다방면에서 소리를 바라볼 수 있게 됐죠.”

  -대학 재학시절 어떤 학생이었는지.

  “친구들에게 저는 얼굴을 보기 힘든 동기였어요. 대학 시절 오디션을 보러 다녔기 때문이죠. 어렸을 적부터 큰 무대에 서보고 싶다는 목표가 있어 오디션에 도전했어요. ‘오디션에서 떨어지더라도 후회는 없어보자’는 마음이었어요. 운이 좋게 제가 도전했던 거의 모든 오디션에 합격했답니다. 학교생활과 병행하면서 했던 모든 활동들이 제게는 자산이 됐어요.”

  -대학 시절 오디션에 붙어서 공연한 무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국립국악원 60주년 개원기념 남원국립민속국악원에서 <춘향전> 공연이 있었어요. 제가 21살이라는 나이에 이몽룡 역으로 캐스팅 돼 국립 프로 단체의 무대에 섰던 적이 있답니다. 꿈꿔왔던 창극 무대였죠. 현장에서 배운 가장 큰 공부였기에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저에게 그 무대가 벅찼지만 무대를 마치고 성취감이 굉장히 컸어요.”

  -중앙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이 있다면.

  “대학 시절 추억이라고 하면 힘들었지만 제게 가장 큰 자산이 됐던 <적벽> 작품 연습 시간이에요. 1학년 때 아침 8시부터 새벽 1시까지 쉴 새 없이 작품 연습을 했었답니다. 당시에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견디기 힘들었던 순간들이었죠. 하지만 지나고 보니 가장 영양분이 됐던 시간들이에요. 창극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학에서 배운 내용들이 너무나 많은 도움이 되고 있을 정도니까요. 도망치고 싶었지만 제 인생을 돌아봤을 때 큰 공부가 됐던 순간들이 기억에 남는 추억이랍니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소리를 하며 보낸 그. 그의 눈빛은 소리의 매력을 이야기할 때 가장 빛났다. “스스로 소리의 매력을 느껴서 이 길을 걷기 시작 했어요. 지금껏 해왔던 일이기에 제가 할 줄 아는 일은 소리밖에 없었답니다. 남들 앞에서 판소리에 자신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저는 판소리밖에 모르기도 했죠. 그렇기 때문에 슬럼프가 오더라도 소리를 하러 다시 돌아오게 됐어요.” 소리에 푹 빠진 그가 말하는 소리의 매력들을 들여다봤다. 

사진제공 김준수 동문
사진제공 김준수 동문

  -소리의 매력은 무엇인가.

  “소리의 매력은 관중들과 소통하며 무대를 할 수 있다는 데 있어요. 그리고 소리 안에는 제 모든 감정들을 쏟아 담아낼 수 있죠. 우리의 소리는 한국인이라면 다 같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장르라는 점에서도 매력적이에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전통 이야기들을 판소리로 한바탕 풀어갔을 때 관객들이 소리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재미가 있답니다.”

  -소리를 할 때 어떤 감정을 가장 많이 담나.

  “저는 개인적으로 슬픈 감정을 좋아해요. 어릴 적 판소리를 배울 때에는 슬픈 감정의 종류가 오직 하나뿐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소리 공부를 계속하면서 슬픔의 종류도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우리가 살아가며 느끼는 슬픔에는 담담한 슬픔, 눈물이 왈칵 날 정도로 진한 슬픔 등 종류가 다양하잖아요. 살아오면서 느끼는 여러 경험과 감정들이 제 소리에 다 녹아드는 것 같아요. 제가 성숙해지는 만큼 제 소리도 성숙해짐을 느끼고 있죠.”

  -소리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 많은 것 같다.

  “소리의 매력은 직접 소리를 들어보거나 무대에 서보지 않고서는 못 느끼는 감정이라 생각해요. 관객들과의 주고받음이 우리 소리의 가장 큰 매력이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판소리를 제대로 듣기도 전에 무조건 판소리는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장르라고 단정 지어 버린 후 귀를 막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워요.”

  -관객과의 소통이 소리의 가장 큰 매력이라는 사실을 언제 처음 느꼈나.

  “제 첫번째 관중은 제가 사는 동네 할머님들이었어요. 할머님들이 제 소리를 듣고 너무 좋아해주셨어요. 그러면서 소리의 매력과 뿌듯함도 동시에 느꼈죠. 소리를 하면서 제가 가장 기뻤던 순간들이기도 했어요. 과연 서양 오페라를 했으면 할머님들이 정도의 반응을 해주실 수 있었을까요. 아니었을 거라 생각해요.”

  앞서 중앙대에서 기억에 남는 추억으로도 소리 연습하던 시간을 꼽은 그는 엄청난 연습벌레다. “연습을 많이 하면 할수록 무대 위에서 자신감이 생겨요. 얼마만큼 연습했느냐가 무대에서 다 보인답니다.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 하라.’는 선생님들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연습을 중요시 여기죠.” 대학 재학 중 국립창극단 정단원으로 입단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는 중이다.

  -국립창극단에 입단했을 때 기분은 어땠나.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죠. 어렸을 때 저에게 가장 큰 목표였거든요. 그만큼 부담감과 책임감도 컸어요. 그래서 창극단 들어가서도 나이는 어리지만 배우로서 우뚝 서고 싶은 마음에 최선을 다했답니다. 틈날 때마다 연습을 했죠.”

  -2018년에는 '완창 판소리' 무대를 갖기도 했다. 짧게는 3시간에서 길게는 8~9시간을 소리꾼 혼자 소화해 내야 하는 완창 무대를 이끌다니 대단하다.

  “완창은 소리꾼이라면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숙제예요. 긴 판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기가 어려운 만큼 정말 많은 연습시간이 필요해요. 자신의 기량을 다 보여주는 자리죠. 따라서 엄청난 수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답니다.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이었죠. 하지만 힘든 과정을 거치고 나니 소리꾼으로서 한발자국 더 발돋움하고 다가갈 수 있었어요. 소리꾼에게는 꼭 필요한 시간 같아요. 다음에 또 완창에 도전하고 싶답니다. 소리꾼으로서 성취감이 굉장하거든요.”

  -국악계의 아이돌이라고도 불린다. 대중에게 소리꾼으로서 존재를 알리게 된 계기는.

  “2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프로단체에 입단해 저를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보러 오시는 관객들이 많았죠. 여러 작품들을 거치고 제 이름을 인정받는 순간들이 생기며 제게 방송 출연 제의가 왔어요. Mnet '너의 목소리가 보여'라는 프로그램이었죠. 우리 소리의 매력을 대중들에게 알릴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 출연하게 됐어요.”

  -TV 프로그램에서 한복을 잘 입지 않는다고 들었다. 이유는 무엇인가.

  “다른 장르와 협업할 때도 오히려 한복은 안 입으려 해요. 한복을 입기 싫어서가 아니라 대중들이 우리 소리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깨고 싶어서예요. 국악 하는 사람은 한복에 익숙한 사람이고 늘 한복을 입어야 된다는 생각도 편견이잖아요. 국악은 갇혀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TV 프로그램에 출연할 때 한복을 잘 입지 않는답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소리에 관심을 갖고 있다. 앞으로 소리를 알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펼칠 예정인가.

  “편하게 대중들과 소통하기 위해 간간이 방송에도 출연하고 있어요. 밴드와 협업하고 있기도 하죠. 앞으로도 여러 가지 시도를 하면서 대중들에게 우리 소리의 매력을 다양하게 알려드리고 싶어요.”

  -앞으로 어떤 소리꾼으로 사람들에게 불리고 싶나.

  “저는 지금 대중들에게 소리를 알리기 위해 많은 가지치기를 하고 있어요. 하지만 소리를 처음 듣고 소리 공부를 시작했던 그날처럼, 마지막까지 전통 소리를 놓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가 되고 싶답니다. 전통 소리의 맥을 이어나갈 생각이에요. 이 맥은 선생님들이 저에게 전승해준 소중한 유산이거든요. 우리의 음악을 잘 보존해 후학들에게 물려줄 생각이랍니다. 결과적으로 뿌리 깊은 소리꾼으로 불리고 싶은 바람이에요.”

  -당신에게 중앙대란?

  “지금의 저를 있게 만들어준 곳이에요. 중앙대 안에서의 배움이 정말 컸어요. 아무것도 몰랐던 저의 시야를 넓혀준 곳이기도 하죠. 중앙대에서의 생활은 제게 터닝 포인트가 되기도 했답니다. 그래서 중앙대를 빛낼 수 있는 인물 중 한사람이 될 수 있다면 너무나 영광일 것 같아요. 그날까지 열심히 해야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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