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그때의 우리! 우리 사회가 21세기에 들어선 지 올해로 20년이 지났다. 지난 20년간 우리 사회는 어떤 문화를 보여줬을까? ‘그때의 교집합’은 2년 단위로 차례차례 각 연도를 거슬러 올라가며 그때의 문화를 살펴본다. 이번에 살펴볼 연도는 ‘2000년’이다. 사회를 뜨겁게 달군 2000년의 키워드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자. 

 

남북정상회담 ∩ 
밀레니엄 베이비 ∩ 
인터넷 신문 = 
탄생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거나 조직 및 제도가 새롭게 등장할 때 대중은 흔히 ‘탄생’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탄생의 어감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탄생을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탄생은 이미 존재했던 것의 파묻힘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탄생을 긍정과 부정이라는 이분법적 시각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 탄생은 새로운 것과 기존의 것을 연결해주는 고리의 역할도 동시에 맡기 때문이다. ‘탄생의 해’라고 이름 지어본 ‘2000년’의 대표 키워드로 ‘남북정상회담’, ‘밀레니엄 베이비’, ‘인터넷 신문’을 선정했다.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회상해보자

 

  집합 A) 남북정상회담

  지난 2000년 6월 13일 평양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전 위원장 간 역사적인 만남이 성사됐다. 이러한 만남에는 양측의 지속적인 노력이 뒷받침됐다. 김대중 대통령이 한반도의 평화를 지향하는 ‘베를린 선언’을 발표함에 따라 북한이 회담 개최 의사를 밝혔다. 몇 차례 협의 과정을 거친 후 그해 「남북 최종 합의서」가 작성돼 남북회담이 성사됐다. 김정일 전 위원장의 초청으로 이뤄진 6.15 남북 정상회담은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된 1945년 이후 55년 만의 손잡음이었다. 이에 관해 김동현 강사(정치국제학과)는 서로의 목적이 적절히 수용된 결과라고 말한다. “남한은 1997년에 발생한 IMF 경제 위기로 인해 경제 활성화를 위한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어요. 북한은 식량난 문제와 정상 국가 진입이라는 목적이 있었죠.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을 논의하는 기회의 장이 형성된 거예요.”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북한 간 공식적인 화해 분위기가 조성됐으며 지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양측 선수가 동시에 입장하는 등 남북 관계에 온기가 돌았다. 남북 평화통일 기반 형성의 공로를 인정받은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을 받았으며 이는 정상회담 직후 지지율이 약 77%까지 상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불어 북한을 향한 당시 대중의 반응도 뜨거웠다. 김동현 강사는 당시 국민의 대북 호감도가 크게 상승했다고 설명한다.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북한 체제와 김정일 전 위원장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조성됐어요. 당시 국민 여론조사에서 약 80% 가까이 북한을 동반자 관계라고 생각한다는 결론이 도출됐을 정도죠.”

 

  집합 B) 밀레니엄 베이비 

  새 천년의 출발점인 지난 2000년 1월 1일에 탄생한 아이를 ‘밀레니엄 베이비’라고 부른다. 새로운 21세기의 시작은 그 해에만 약 64만 명의 아이가 태어나는 이례적인 출산율을 이끌었다. 이듬해인 지난 2001년에 태어난 아이의 수가 약 56만 명임을 감안할 때 2000년의 출산 수치는 기록적이다.

  이러한 현상에 관해 최율 교수(사회학과)는 관습의 영향이 주된 요인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나라에는 ‘그해 운’에 관한 관습이 깊이 자리하고 있어요. 황금돼지해에 출산율이 증가한 점도 하나의 예시죠. 밀레니엄 베이비 역시 이러한 현상에 2000이라는 숫자의 상징성이 결부된 결과라고 볼 수 있어요.” 김광준 산부인과 의사(의학부 교수)는 부모의 양육심리가 출산율 상승에 기여했다고 덧붙여 설명한다. “당시는 자식을 한, 두명만 낳고 기르자는 대중의 경향이 짙은 시대였어요. 이는 공을 들여 자녀를 키우겠다는 부모의 심리를 극대화하는 결과로 이어졌죠. 이러한 부모의 마음이 새 시대의 특별함과 맞물리면서 출산율을 증가시킨 거예요.”

  밀레니엄 베이비는 출산율 상승 이외에도 다양한 나비효과를 가져왔다. 2000년이라는 시대에 걸맞게 한자 천(千)을 이름에 넣는 작명 대란이 벌어졌다. 또한 ‘밀레니엄의 첫아이’라는 타이틀을 희망했던 부모들은 1월 1일 출산을 위해 산부인과 상담을 받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일부 병원에서는 ‘밀레니엄 베이비를 낳으려면 3월 말에서 4월 중순 사이에 성관계를 가져라’는 ‘잉태 지침’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김광준 산부인과 의사는 최초의 밀레니엄 베이비가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고 설명한다. “당시 첫 밀레니엄 베이비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았어요. 차병원, 서울대병원에서는 미리 초청한 방송사를 통해 첫번째 밀레니엄 베이비를 축하하기도 했죠.” 

  집합 C) 인터넷 신문

  지난 1990년 초반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이 등장했다. 대중은 신속한 일 처리가 가능한 인터넷 공간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에 열광해 생활의 일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에 1990년대 중반 인터넷을 통해 처음으로 뉴스가 공급됐다. 하지만 당시 언론사는 따로 인터넷 전용 기사를 제작하는 구조가 아니었다. 종이 신문의 내용을 그대로 포탈 사이트에 올리는 ‘인터넷 종속형 신문’이 전부였다. 이후 지난 2000년 인터넷을 진정한 정보제공의 매개체로 사용한 ‘인터넷 전용 신문’이 탄생했으며 인터넷 신문 시장이 확장됐다. 인터넷 신문은 빠른 속도와 접근성을 강점으로 내세웠다. 이런 인터넷 신문의 신속한 정보제공은 정해진 시간에만 소식을 전달받을 수 있던 종이 신문의 한계를 극복했다. 

  강연곤 교수(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는 인터넷 신문 시장이 확장된 주요 원인을 ‘비용 절감’이라고 설명한다. “인터넷 신문은 법에서 정한 최소한의 인원과 일정한 발행주기만 갖추고 있다면 누구나 운영할 수 있었어요. 그간 진입장벽이 높았던 뉴스 업계에 변화가 가능하게 된 거죠.” 인터넷 신문의 확장은 기존 언론사가 독점해온 저널리즘을 개방하는 결과를 낳았다. 
김수정 강사(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는 인터넷 신문의 특징인 ‘속보성’을 기반으로 대중이 신문을 능동적으로 탐독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한다. “인터넷 신문을 통해 대중은 실시간 ‘속보’를 접하게 됐어요. 종이 신문만 보던 소비자들에게는 실시간으로 신문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왔죠.” 

  이러한 강점을 바탕으로 인터넷 신문은 꾸준히 발전했다. 이에 따라 인터넷 신문의 활성화가 종이신문의 종말로 직결된다고 생각하는 시각도 등장했다. 위기를 직감한 종이신문 제작자는 인터넷 신문과 차별점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김수정 강사는 이러한 현상을 종이 신문의 ‘고퀄리티화’라고 설명한다. “종이 신문은 고퀄리티 저널리즘을 지향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우게 됐어요. 그 결과로 대중 역시 고퀄리티 신문을 지향하는 집단과 빠르고 직접적인 접근이 가능한 인터넷 신문을 지향하는 집단으로 나뉘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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