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매개로 휴머니즘을 추구한 윌리엄 유진 스미스. 그의 검지가 포착한 찰나의 순간은 세상을 이롭게 바꿨습니다.  신문이라는 매체에서 사진이 가진 파급효과는 엄청납니다. 사건을 포착해 한 장의 사진으로 보여주는 보도사진은 세상의 변화를 촉구하는 목적으로 사용되곤 하죠.

  하지만 일부 보도사진에 빈곤 포르노적 요소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지난 1994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독수리와 어린 소녀」를 예시로 들어보죠. 작품에는 뼈만 남은 몸으로 한줌의 지푸라기를 부여잡고 생존을 갈망하는 소녀와 그녀의 죽음을 기다리는 듯한 독수리의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케빈 카터가 촬영한 이 사진은 빈곤에 허덕이는 수단의 비참한 현실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해당 작품에는 빈곤 포르노적 요소가 명백히 담겨있습니다. 촬영 당시 실상은 이렇습니다. 구호소로 향하는 소녀의 어머니가 잠시 아이를 내려놓은 틈에 독수리가 절묘하게 내려앉았고 케빈 카터는 그 장면을 포착했습니다. 현장에는 사진 속에서 묘사되던 죽음을 앞둔 소녀와 이를 기다리는 독수리는 없었습니다. 잠시 부모의 손길에 벗어난 소녀, 땅에 착지한 독수리 그리고 사건을 극적으로 촬영한 사진가의 검지만 존재했죠. 사진가는 ‘과장된 재현’을 통해 피사체의 비극을 강조하고 진실과 다른 모습을 연출했죠. 

  케빈 카터는 동의 없이 촬영을 진행했습니다. 촬영 당한 소녀의 개인적 인격도 무시됐죠. 사진 속 소녀는 수동적 피사체로 누군가의 도움이 요구되는 모습으로 묘사됐습니다. 그에겐 앙상하게 마른 몸과 무기력한 피해자란 낙인이 찍혔죠. 하지만 「독수리와 어린 소녀」는 수단에 세계적 구호의 손길을 이끌었습니다. 해당 사건은 촬영과정의 비도덕성과 보도 사진의 파급효과의 대표적인 예시로 회자됩니다.

  빈곤의 아픔을 나타내는 보도사진에서 피사체는 객체의 역할을 했습니다. 렌즈 속 세상에서 연출의 도구로써 사용됐죠. 사건을 과장해 묘사하면 사진에 파급효과를 부여함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는 충격요법일 뿐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하죠.

  진정으로 빈곤 해결을 위한 사진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피사체가 사진의 주체가 되는 사진은 어떤가요? 그들의 연출되지 않는 진짜 삶에 초점을 맞춰서 말입니다. 코웨이가 진행한 ‘코웨이 카춤과 희망학교’ 프로젝트가 남긴 사진을 볼까요. 해당 프로젝트는 대표적인 빈곤 지역 중 하나인 아프리카 말라위에 학교를 건립했습니다. 이 사진엔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희망과 행복이 가득 찬 아이들의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점차 기본적인 인권이 보장되는 긍정적인 현실을 비추고 있죠.

  기부 수혜자는 힘겨운 현실을 겪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개선 의지가 없는 무기력한 피해자가 아닌 인간적인 삶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그 모습을 공감하며 응원하는 연대를 이끌어내는 검지. 이것이 바로 책임감 있는 검지가 아닐까요?

장준환 사회부 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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