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그때의 우리! 우리 사회가 21세기에 들어선 지 올해로 20년이 지났다. 지난 20년간 우리 사회는 어떤 문화를 보여줬을까? ‘그때의 교집합’은 2년 단위로 차례차례 각 연도를 거슬러 올라가며 그때의 문화를 살펴본다. 이번에 살펴볼 연도는 ‘2002년’이다. 사회를 뜨겁게 달군 2002년의 키워드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자. 
 

“꿈☆은 이루어진다
촛불이 어둠을 밝히면
우리들의 영원한 오빠”


‘클래식 블루’, 미국의 색채 연구소 팬톤(Pantone)은 새로운 시대의 안정감과 무한한 사고 확장의 의미를 담아 ‘올해의 컬러’를 선정했다. 지난 2002년에는 정열과 사랑을 연상시키는 ‘트루 레드’가 당해의 컬러로 선정됐다. 해당 색상은 9.11 테러 이후 회복에 관한 애국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대한민국도 팬톤의 의도와 통했던 걸까. ‘트루 레드’는 월드컵의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던 우리나라의 한 해를 대표한 색상이기도 하다. 

  ‘올해의 컬러’를 비롯한 새로운 트렌드는 꾸준히 탄생하고 있다. 다양성이 공존하는 가운데 트렌드가 사회를 이끌 수 있는 이유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관, 즉 시대정신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지난 2002년에는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대한민국을 외친 ‘우리’가 있었다. 뜨거웠던 우리를 기억하는 해당 연도의 키워드로 ‘월드컵’, ‘반미(反美)’, ‘1세대 아이돌의 해체’를 선정했다. 그 시절 우리는 무엇에 OO하고 있었을까. 

 

  (A) 열광 : 월드컵과 붉은악마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대한민국에서 이 구호 모르면 간첩이다. 지난 2002년 제17회 월드컵은 대한민국과 일본이 공동 개최했다. 2002 월드컵은 유난히 이변이 많았다. 강력 우승 후보였던 프랑스와 아르헨티나가 조별리그에서 침몰했고 우리나라는 거침없는 상승세를 타고 4강에 진출했다. 김종환 교수(스포츠산업전공)는 우리나라가 전대미문의 성적을 거둔 요인을 설명한다. “늘 예선에서 탈락하다가 기적의 성과를 거둔 데는 홈그라운드의 이점과 함께 유럽과 다른 축구 시즌이 강점으로 작용했어요. 유럽은 6월 말이면 시즌이 끝나지만 우리나라는 3월부터 12월까지 시즌에 해당하기 때문에 장기적인 준비가 가능했죠. 또한 히딩크 감독의 코칭 아래 이뤄진 체계적인 준비도 한몫했다고 생각해요.”

  온 국민이 빨간 티셔츠를 입고 하나 된 2002 월드컵을 기점으로 ‘붉은악마’는 대한민국 축구를 응원하는 국민의 대명사가 됐다. 지난 1992년 대한민국 최초의 온라인 축구동호회(하이텔 축구동)에서 시작한 ‘붉은악마’ 단체는 응원 및 서포터즈까지 활동 범위를 확장해 이제는 대한민국축구국가대표팀을 응원하는 대표 단체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붉은 악마 대의원으로 활동한 양원석 씨(48)는 월드컵 시작 전부터 국내 응원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고 이야기한다. “지난 2001년 겨울까지만 해도 대표팀 경기에서 응원 가락을 못 맞추는 분들이 많았어요. SKT 광고에 등장한 ‘대~한민국’, ‘오~필승코리아’와 같은 구호에 맞춰 함께 응원하는 문화부터가 시작점이었죠.”

  ‘2002 월드컵 응원’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건강한 축구 응원 문화가 확립됐다. 양원석 씨는 이때를 기점으로 응원 문화가 긍정적으로 변화했다고 덧붙인다. “이전에는 경기장에서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행위가 당연시됐어요. 월드컵 이후 명확한 응원가와 함께 성숙한 응원 문화가 자리 잡았죠.”

  당시 붉은악마 응원단장으로 활동한 유영운 씨(49)는 대한민국축구대표팀을 응원하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붉은악마’라는 말을 전한다. “붉은악마는 특권단체가 아니에요. 어디서든 대한민국 축구를 응원하고 있다면 당신이 곧 붉은악마랍니다.”

  (B) 분노 : 효순이 미선이 미군 장갑차 압사 사건

  지난 2002년 6월 13일, 꽃다운 나이의 여중생 두 명이 미군의 장갑차에 압사당했다. 이에 주한 미군과 미국 정부의 미온적인 대처는 전 국민의 비통함을 원통함으로 몰아넣었다. 『한국의 반미』를 집필한 남북사랑학교 심양섭 교장은 해당 사고 이후의 대처 과정을 반미감정이 증폭된 원인으로 짚는다. “해당 사건에 관한 재판이 미국 군사법정에서 진행됐어요. 장갑차를 조종한 두 병사는 무죄로 석방됐죠. 미군이 유족들에게 민사적 배상은 했지만 공무 중 과실사고를 근거로 한 무죄 평결로 형사적 책임의 주체가 사라진 상황이었어요.” 

  당시 분노한 국민 사이 반미 담론이 형성됐다. 시민사회는 범국민대책위원회를 조직해 온라인 활동과 항의 시위를 펼치며 대중적 분노를 이끌었다. 나아가 ‘무죄 판결’은 대중의 정서적 단결이 미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 누리꾼의 제안으로 시작된 여중생 추모 촛불행사는 광범위한 계층과 연령이 참여하는 전국적 대중집회 형식으로 퍼져나갔다. 이를 통해 촛불집회가 집단의 의견과 주장을 피력하는 하나의 집회문화로 정착하기도 했다. 

  한편 심양섭 교장은 민족 이슈에 의해 다른 문제를 간과하는 현상을 경계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우리 사회에는 안보, 경제, 인권 등 중요한 가치들이 존재해요. 그 가운데 민족 이슈가 지나치게 강조되면 다른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죠. 오늘날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비리가 폭로되고 있는 현상이 그 예시라고 볼 수 있어요.”

  (C) 사랑 : 1세대 아이돌의 해체

  ‘단지 널 사랑해~ 이렇게 말했지♪’ 없는 추억도 생성시키는 기억조작 노래! 90년대의 우상 H.O.T의 대 히트곡 <캔디>의 후렴구다. 중독성 있는 가사와 앙증맞은 춤사위까지 요즘 젊은 세대도 알만한 가요계의 전설이다. 그런데 지난 2000년, 젝스키스를 시작으로 H.O.T.와 S.E.S. 등 1세대 아이돌이 줄줄이 해체를 선언했다. 이에 따라 지난 2002년부터는 퍼포먼스형 1세대 아이돌 그룹이 잠정 침체기에 들어갔다.

  1세대 아이돌 해체가 불러온 반향은 상당했다. 1세대 아이돌 팬들은 당시 그룹의 해체 소식에 패닉 상태에 빠졌다. 조은재 대중음악평론가(웹진 아이돌로지 필진)는 1세대 아이돌의 해체가 팬들에게 ‘처음’이었기에 더 큰 충격을 가져왔다고 설명한다. “1세대 아이돌 그룹의 해체는 팬들에게도 첫 경험이었어요. 젝스키스의 열혈 팬들이 어린 마음에 차를 부순 소동도 있었죠. 반면 이제는 다양한 아이돌이 데뷔하고 해체하는 현상이 이전보다 자연스러워졌어요.”

  1세대 아이돌 팬들은 처음이기에 미숙했지만 집회, 서명운동, 신문광고 등 기존에 없던 적극적인 팬덤 문화를 실현하기 시작했다. 서정민갑 평론가는 이때 팬들이 스타를 지키기 위해 사회적 역할을 하는 존재로 나아갔다고 말한다. “1세대 아이돌 팬들은 콘서트 관람과 음반 구매 등 일방향적 행위를 넘어 스타에 관한 부당한 보도나 왜곡된 사실에 적극적으로 대응했어요. 스타를 키우고 지키기 위해 의사를 표출하는 등 팬덤이 사회적 역할을 하게 된 거죠.”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아이돌 그룹은 해체했지만 팬덤의 활동은 끝나지 않았다. 서정민갑 대중음악평론가는 1세대 팬들의 높은 충성심이 오히려 팬덤 활동을 지속하는 원동력이 됐다고 덧붙인다. “1세대 아이돌 팬덤은 20년 이상 활동을 이어오고 있어요. 당시의 열렬한 팬심과 충성심이 지금까지 팬덤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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