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교육을 위한 공공기관이다. 교육을 받기 전과 후 학생들의 행동과 생각에는 변화가 나타난다. 이처럼 교육은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인천시 교육계를 진두지휘하는 자리에서 교육의 더 나은 방향성을 거듭해 고민하는 도성훈 동문(국어국문학과 79학번)을 만나봤다.

사진제공 인천광역시 교육청

더 나은 교육

‘우리’의 내일을 위해

삶의 힘이 자라는

따뜻한 세상을 바라며

“우리 학생들이 학교에서 행복하게 교육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선생님도 제자를 가르치는 데 있어 보람과 가치를 느낄 수 있었으면 해요.” 인터뷰 도중 도성훈 동문이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우리’였다. 그는 학생, 교사, 학부모로 이뤄진 학교 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학교를 사랑하는 그에게선 따뜻함이 풍기기도 했다. 교육 불평등이 해소된 따뜻한 세상을 꿈꾸며 오늘도 앞장서는 그와의 만남을 들여다봤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로 인해 늦게나마 모든 학교가 온라인으로 개학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었기에 혼란이 많았을 것 같은데.

  “맞아요. 어려움이 많았죠. 코로나19로 갑작스럽게 원격수업이 시작됐거든요. 그렇기에 처음에는 원격 수업이 완벽히 준비된 상태가 아니었어요. 초창기에는 EBS 원격 수업 플랫폼이 정부 차원에서 준비돼 있기는 했어요. 2주 만에 1000여명정도가 사용할 수 있는 EBS 클래스를 300만명이 쓸 수 있도록 준비하는 과정에 있어 서버가 다운되기도 했답니다. 혼란 그 자체였죠.(웃음)”

  -원격 수업이 차질 없이 진행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원격 수업은 기존에 있던 컴퓨터, 스마트패드, 스마트폰과 같은 기기를 이용해 진행하고 있어요. 기기를 갖지 못한 학생들에게는 기기를 대여해주거나 아예 지급하기도 했어요. 이외에 온라인 학급 운영을 비롯해 원격 수업 진행에 필요한 여러 예산을 마련한 뒤 지원하고 있답니다.

  선생님들은 zoom을 이용한 쌍방향 화상 수업, 동영상을 이용한 콘텐츠 수업, 과제학습 이 세가지 수업 방식과 더불어 이것들을 혼합한 수업이 가능해요. 원격 수업 방식에 당황하던 선생님들이 이제는 협업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요. 기기 운용 능력이 뛰어난 젊은 선생님과 풍부한 노하우를 가진 경력 있는 선생님 간 협업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소통도 지속해 안정을 찾아 나가고 있어요.”

  -장애 학생 지원도 이뤄지고 있나.

  “물론이죠. 수업에 차질 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꾸러미를 만들어 집에 보내준답니다. 꾸러미를 가지고 집에서 학습을 준비한 후 수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하지만 집에서의 학습은 한계가 있기에 장애학생을 둔 부모들이 가장 등교 개학을 원하는 상황이기도 하죠.”

  -실제 원격수업을 진행하는 학교 현장도 방문해봤다고.

  “학교 현장에서 선생님들의 열의와 정성이 참 대단하다고 느꼈어요. 그 어느 때보다도 변화가 많은 시기에 선생님들 사이에서 수업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답니다. 선생님들의 열정과 노력이 굉장한 상황임을 실감했죠. 영상을 통해 자신의 수업을 점검하는 선생님들의 노력과 함께 학생 개별 맞춤형 교육도 온라인을 통해서 잘 이뤄지고 있었답니다. 정해진 시간 외에도 학생들과 소통하다 보니 선생님들이 밤늦게까지 학생들에게 답변해주는 경우도 많죠. 선생님들을 많이 격려해줬으면 좋겠어요.”

도성훈 교육감이 지난달 16일 강화 강서중학교 온라인 입학식 현장을 방문했다.
도성훈 교육감이 지난달 16일 강화 강서중학교 온라인 입학식 현장을 방문했다. 사진제공 인천광역시 교육청
이태원 클럽 발 학원 집단감염 발생과 관련해 지난 13일 긴급 언론 브리핑을 하고 있는 도성훈 교육감.
이태원 클럽 발 학원 집단감염 발생과 관련해 지난 13일 긴급 언론 브리핑을 하고 있는 도성훈 교육감. 사진제공 인천광역시 교육청

  지금은 인천광역시 교육감으로서 교육계를 이끄는 그이지만 처음부터 교육자에 뜻이 있지는 않았다. 그는 중앙대 국어국문학과 재학 시절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기보다는 친구들과 놀기를 더 좋아하던 학생이었다. 10.26사태와 12.12사태가 휩쓸고 지나간 그 어느 때보다 추웠던 지난 1979년, 중앙대를 입학한 그의 학창 시절 한켠으로 들어가 봤다.

  -중앙대 재학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이 있다면.

  “친구들하고 밴드를 만들어서 공연한 추억이 기억에 남아요. 워낙 가난했던 시절이어서 기타 살 돈도 없었는데 부잣집 친구가 기타 사줄 테니 같이 공연하자고 해서 베이스 기타를 쳤었죠. 국문과 신입생환영회 때 공연도 하고 그랬답니다.(웃음)”

  -공연 쪽에 꿈이 있었나.

  “그런 거 없었어요.(웃음) 친구들이랑 어울려 놀다가 그룹을 결성했어요. 친구들이 ‘넌 키 크니까 베이스 쳐라’라고 했죠. 그래서 제가 베이스를 치게 됐어요.(웃음) ‘젊은이 가요제’에도  참가해 1차 예선을 통과하고 2차 예선에서 떨어졌어요. 2차 예선은 라디오로 중계하기에 TBC라는 방송국에 갔었어요. 방송국에 도착해보니 무장한 군인들이 그곳을 점령해 있었죠. 군인들이 총을 들고 있는데도 우리가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올라갔던 기억이 잘 안 잊혀지네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2만4000원 정도의 출연료를 받고 친구들이랑 맥주 먹고 헤어졌어요. 그다음부터 모이지 않았답니다.(웃음)”

  -당시 군인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아이고…. 어떤 생각이 들기보다는 그냥 답답했죠. 학교에도 탱크가 들어와 있었으니까요. 당시 언론사도 사실을 엄청 왜곡해서 보도했어요. 잘못된 상황이라는 사실에는 모두가 공감을 했었답니다. 그렇지만 저는 앞에서 적극적으로 운동하는 학생은 아니었죠.”

  -국어국문학과 학생에서 교사라는 직업에 이르기까지 연결고리가 있다면. 

  “할아버지께서 절을 짓는 대목(大木)이셨어요. 또 한학을 하셔서 동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 역할을 하셨죠. 어렸을 때 할아버지 이웃 한분이 집에 오시면 할아버지께서는 호롱불 밑에서 역사 이야기를 하시곤 했어요. 저는 옆에서 어렴풋이 들었던 기억이 난답니다.

  그런 할아버지 아래에서 자랐기에 교사라는 직업에 생각이 아예 없지는 않았어요. 그러던 와중에 대학 시절 교수님께서 교직이수를 추천해주셨죠. 교직이수를 하면서 ‘교사가 적성에 맞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자연스럽게 졸업을 한 후 사립학교로 시험을 봐서 선생님이 됐어요.”

  사립학교 교사 초창기 그는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교사였다. “처음에는 교사의 법정 근로시간도 몰랐어요. 학교에서 퇴근하라고 하면 그제서야 퇴근을 했거든요. 어느날 다른 학교에서 근무하다 전근 온 선생님께서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 왜 퇴근을 하지 않냐고 물어보셨어요. 그때 처음 법정 근로 시간을 알게 됐답니다. 미개했던 시절이었죠.(웃음) 그전까지는 학교에서 정해준 아침 7시 40분부터 저녁 7시까지 무조건 근무해야 하는 줄로만 알았었죠.”

  -교사 시절 학교 교육현장에 모순을 느끼고 교육 운동에 참여했다고 들었다. 특히 어떤 모습에서 모순을 가장 많이 느꼈는지.

  “26살에 교사가 됐는데 당시 제가 쓰러질 정도로 잠을 거의 못 잤어요. 4시간도 못 잤죠. 교재연구와 40시간의 수업을 하며 아주 어려운 시간을 보냈답니다. 그러던 도중 학교 재단이 교체됐는데 잡부금을 걷기 시작했어요. 학생들이 이용하는 교실 환경을 개선하는데도 학생들한테 돈을 받아 갔답니다. 체육 대회를 할 때는 학부모들한테 기부금을 받았죠. 이 상황이 3년 정도 지속되다 보니 뭔가 이상했어요. 학교가 이상하다고 선생님들과 이야기하게 됐죠. 결국 학교에 문제가 있으니 이야기해보자며 모임을 만들었어요.”

  -적극적으로 재단에 대응했나 보다.

  “제가 초대회장이라는 자리에 앉아 학교에 요구사항을 전달했어요. 학교가 요구사항을 안 들어주니까 이에 항의하며 학교와 싸우게 됐죠. 학교와 싸우는 과정을 거치면서 국회 국정감사 자료를 전부 분석해봤어요. 이를 통해 그간 발생한 학교의 비리들을 알 수 있었죠.

  우리 회원 가운데 숙직하던 동료 교사가 400만원을 도난당하기도 했어요. 학교 비리 항의 과정에서 재단에 퇴직 압력을 받던 도중 발생한 사건이었어요. 결국 그분은 퇴직 압력에 못 이겨 그만둘 수 밖에 없었죠. 보복적인 도난 사건이 아닌가 싶어 항의했답니다. 하지만 항의했다는 사실을 빌미 삼아 학교 재단은 다시 5명의 교사를 파면 해임시켰어요. 파면 해임된 사실을 알고 그날부터 학교에서 농성이 시작됐답니다. 종례가 끝나고 봄방학을 맞이해 집으로 가던 학생들이 전부 학교로 들어오게 되고, 학생들이 안 오니까 학부모님들이 학교로 오게 되면서 전면적인 농성이 시작됐죠.”

  -기나긴 싸움의 끝은 무엇이었나.

  “우리가 학부모들한테 미리 7장 정도의 B4용지에다 학교 비리를 정리한 자료를 발송해놓았어요. 학교 재단을 대상으로 한 청문회도 진행했죠. 결국 23일간의 농성으로 파면이 전부 취소되고 추가로 15명의 교사를 뽑았답니다. 교장, 교감도 해임됐어요. 숙직도 개선되기 시작했죠. 이 사건이 교사 숙직 개선의 출발점이 됐답니다. 재단과 26개 사안을 합의하기도 했어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에는 어떻게 가입하게 됐나.

  “농성이 끝나고 사회의 어두운 이면에 눈을 뜨기 시작했어요. 이후 전교조 결성이 시작된 사실을 알고 전교조에 가입하게 됐어요. 하지만 복직 이후 전교조에 가입했다는 사실만으로 다시 해직됐어요. 해직된 교사들이 모여 전교조 사무실에서 토론을 나눴죠.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대학 때 학생운동을 적극적으로 했던 교사들이 사용하는 용어조차 알아듣지 못하는 저를 발견했어요. 그때부터 다시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며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사회운동에 눈을 뜨기 시작해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됐답니다.”

  '전국 최초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 시대를 연 교육감.' 그가 이룬 성과엔 ‘최초’란 말이 접두사처럼 따라붙는다. 지속적인 학교 신설과 증축, 학교공간을 사용자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공간혁신사업, 초중고 모든 교실에 공기청정기 설치 등 인천시 교육은 그와 함께 변화의 바람을 맞이하고 있다. “변화를 이끌기 위해서는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해야 해요. 그렇기에 변화의 속도를 늦추게 하는 과거 관행과의 싸움이 가장 어려웠답니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그가 만들어낸 변화의 싹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진 고민주 기자

  -인천광역시 교육감으로 재직하면서 굉장히 많은 정책들을 시행했다. 어떤 성과를 거뒀나.

  “인천시의회와 교육청이 인천 교육 발전을 위한 공동선언을 했어요. 협치를 강화하기 위한 토대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죠. 그런 토대 위에서 무상교육에서부터 ‘폭력 없는 인천, 생명존중 인천’을 필두로 한 목표와 성과를 거둬나가고 있답니다.”

  -타 지방자치단체와는 다른 인천시만의 교육과정도 마련했다고.

  “코로나19를 통해서도 명확히 드러났듯이 우리는 내 건강이 이웃나라의 건강과 직결되는 상황에 처해 있어요. 따라서 세계 시민성을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글로벌의 범위가 넓다 보니 교육 내용이 추상적일 수 있어 동아시아로 범위를 한정했죠. 동아시아 시민교육이라고 하는 인천만의 교육과정을 만들었어요. 동아시아 시민교육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인천과 동아시아 주요 국가의 문화이해·언어교육이에요. 더불어 우리나라의 역사를 번역해서 외국 학생들에게 알려주는 사업도 하고 있죠.”

  -여러 정책 가운데 정책 시행까지의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정책은 무엇이었나.

  “경기도에서 시작해 혁신학교가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어요. 인천에는 현재 72개교의 혁신학교가 있죠. 저는 인천에 있는 모든 학교가 혁신 교육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라요. 그렇게 된다면 혁신학교라는 명칭도 없어질 테죠. 그런 날을 꿈꾸고 있어요. 따라서 현재 혁신 교육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인천시 교육이 나아가기 위한 노력들을 하고 있답니다. 노력에 비해 변화의 속도가 느렸던 사안이기는 했어요. 그래도 코로나19로 우리가 정말 하고 싶었던 여러 변화의 싹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어요.”

  -변화의 싹이 나타나는 부분은.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협력해 교육과정, 교육내용을 만들어가는 모습에서 변화의 싹들을 보고 있어요. 1:1로 상담하면서 이뤄지는 개별 맞춤형 수업은 쉽게 추진하기 어려워요.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 있어 수업의 변화가 제일 어렵기 때문이죠. 이번에 원격 수업을 진행하며 변화의 싹을 볼 수 있었어요. 교육의 본질적인 부분에서 상당히 새로운 변화를 맞았죠. 앞으로 어떻게 지원해야 이런 변화들을 제대로 진행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을 하고 있답니다.”

  -앞서 언급했던 전교조 해직 당시 꿈꿔왔던 교육을 지금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당시 교육이나 의료는 국가에서 책임져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 한 30년 만에 전국 최초로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을 실시하게 됐으니 개인적으로 아주 뜻깊답니다.”

  -앞으로 교육감으로서 목표는 무엇인가.

  “‘삶의 힘이 자라는 우리 인천 교육’이 제 꿈이에요. 스스로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존재로서 자라나는 학생들을 바라보고 싶어요. 학생들이 집에서 사회로 나가는 중간 과정에 학교가 있어요. 변화를 통해 존중하고 배려하는 민주적인 공동체 문화가 학교에서부터 형성되길 바라요. 민주시민교육이 학교에서 꽃 필 수 있는 인천이 되었으면 한답니다. 이것이 앞으로 교육감으로서의 목표랍니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중앙대는 제 삶의 터닝 포인트예요. 사실 고등학교 때까지 기억이 저는 별로 없어요. 부평고 복도에 시험 등수가 붙여진 기억 밖에 안 남았을 정도예요. 그랬던 제가 사회적인 격변기였던 시기에 대학교에 가서 굉장히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어요. 고등학교 때까지는 완전히 갇혀있었던 제 세상이 넓어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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