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그때의 우리! 우리 사회가 21세기에 들어선 지 올해로 20년이 지났다. 지난 20년간 우리 사회는 어떤 문화를 보여줬을까? '그때의 교집합'은 2년 단위로 차례차례 각 연도를 거슬러 올라가며 그때의 문화를 살펴본다. 이번에 살펴볼 연도는 '2006년'이다. 사회를 뜨겁게 달군 2006년의 키워드가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자.

 

바야흐로 ‘show’의 시대다. 인스타그램 계정만 봐도 누군가의 성격과 취향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SNS를 통해 활발히 자신을 보여주고 있다. 온라인 플랫폼에서는 개인의 일상 콘텐츠뿐만 아니라 인기몰이를 위한 연출, 수익성 광고 등 다양한 쇼가 행해지고 있다. 

  ‘쇼’는 구경거리 또는 관객에게 즐거움을 제공하는 무대예술을 가리킨다. 그러나 해당 단어는 단순히 ‘보여주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비아냥거리는 어투의 ‘쇼하고 있네’라는 말처럼 실속 없이 겉으로 내세우는 행위를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지난 2006년의 ‘쇼’는 어떤 의미로 사용됐을까? 해당 연도의 ‘쇼’를 대표하는 키워드로 ‘공개 코미디’, ‘백남준’, ‘황우석’을 선정했다. 당시에 펼쳐졌던 다채로운 쇼를 구경하러 떠나보자.

'마빡이'의 시그니처 포즈를 선보이는 개그맨들의 모습(사진출처 KBS2 홈페이지)
'마빡이'의 시그니처 포즈를 선보이는 개그맨들의 모습(사진출처 KBS2 홈페이지)

  집합 A) 공개 코미디 전성기

  “내가 누군 줄 알아? 골목대장 마빡이!” ‘마빡이’는 지난 2006년 KBS에서 방영했던 ‘개그콘서트(개콘)’의 코너다. 단순히 이마를 손으로 두들기는 행동만으로 폭소를 유발했던 해당 코너는 여태까지 본 적 없는 개그 코드로써 전설로 남았다. 2006년도는 개그콘서트뿐만 아니라 SBS ‘웃찾사’, MBC ‘개그야’ 등이 유행했던 공개 코미디의 황금기였다.

  코미디쇼는 지난 1970년대 유랑극단을 중심으로 한 첫 전성기 이후 2006년대에 두 번째 전성기를 맞이했다. 유경한 교수(전북대 신문방송학과)는 2000년대에 미국 ‘스탠드업 코미디’를 결합한 새로운 방식의 정착이 코미디쇼의 인기 요인이었다고 설명한다. “콩트 형태에 미국 스탠드업 코미디를 결합한 방식이 우리나라 공개 코미디쇼 발전에 큰 역할을 했어요. 현장감을 살린 실시간 연기로 인기를 끌었죠.”

  2000년대에 들어 가속화된 인터넷의 대중화도 코미디쇼 인기에 한몫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인터넷의 쌍방향성이 코미디쇼에도 적용됐다고 이야기한다. “시청자가 온라인 공간에 의견을 남기거나 패러디 UCC와 같은 콘텐츠를 생산하는 문화가 유행했어요. 공개 코미디가 해당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젊은 세대에게 큰 인기를 끌었죠.” 실제로 일반인의 마빡이 패러디 영상이 대거 올라오는 등 패러디 열풍이 대단했다.

  그러나 요즘 코미디쇼의 인기는 예전만 못한 실정이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무선 인터넷의 보급으로 인한 콘텐츠 생산의 신속화를 언급하며 코미디쇼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코미디쇼는 모바일 환경에서 소비되는 콘텐츠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어요. 오히려 코미디쇼가 과거의 비대면 형식으로 역행하면 어떨까 해요. 단편적인 유머보다는 상황이 유발하는 웃음과 같이 삶의 이야기에서 개그를 찾는 시도가 필요한 것 같아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돼있는 백남준의 작품 '다다익선' (사진출처 뉴시스 2018-08-30)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돼있는 백남준의 작품 '다다익선' (사진출처 뉴시스 2018-08-30)

  집합 B) 백남준 타계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 백남준 작가가 지난 2006년 타계했다. 시간을 넘나드는 사유를 예술로 승화시킨 그의 생애(1932-2006)는 74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으로 정리될 수 없다. ‘우리 몸은 1cm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우리의 생각을 옮긴다.’ 백남준 작가가 제시한 정주 유목민(stationary nomad)의 개념이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수입을 창출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디지털 노마드’와 의미가 상통한다는 점에서 그의 놀라운 선구안을 짐작할 수 있다. 

  작가의 타계 이후 KBS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특별전 ‘백남준 비디오 광시곡’을 개최했다. 이대영 교수(공연영상학과)는 백남준 작가가 예술의 역사를 새롭게 개척한 인물이자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라고 소개한다. “앤디워홀이 팝아트의 선구자라면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예요. 1984년 새해 첫날 백남준 작가의 미디어 아트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위성을 통해 전 세계에 동시 생방송으로 송출됐어요. 브라운관이라는 매체를 예술의 질료로 활용한 것이죠. 전파 매체의 특성을 활용해 텔레비전으로 구성한 다수의 전자콜라주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죠.”

  백남준 작가의 예술혼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08년 경기도 용인시에 백남준 아트센터가 개관했다. 김선영 학예사(백남준 아트센터)는 해당 공간을 백남준 작가의 예술 활동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건립했다고 소개한다. “백남준 아트센터의 다른 이름은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에요. 작가의 예술관을 미래로 확장하기 위해 전시와 예술교육, 신진작가 발굴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죠. 미디어 시대의 가능성을 확장하고 새로운 담론을 수용하는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철회된 황우석 박사 줄기세포 논문 (사진출처 PubMed)
철회된 황우석 박사 줄기세포 논문 (사진출처 PubMed)

  집합 C) 황우석 교수 파면 의결

  한때 우리나라 과학계의 위상을 드높인 국민 영웅으로 추대받았으나 연구 부정행위를 저질러 희대의 사기꾼으로 전락한 인물이 있다. 바로 황우석 ‘전前’ 대학교수다. 그가 지난 2004년 ‘사이언스’지에 발표한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세계 최초라는 수식과 함께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지난 2005년 MBC PD수첩의 보도로 해당 논문이 조작된 사실이 폭로됐다. 이에 지난 2006년 서울대 징계위원회는 황우석 전 교수의 파면을 의결했다.

  당시 황우석 전 교수의 논문조작 진상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그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이영희 교수(가톨릭대 사회학과)는 해당 현상이 대중의 애국주의적 정서에 기반을 둔다고 설명한다. “황우석 전 교수 지지자들은 스스로 집단화해서 비합리적인 대중행동을 지속했어요. 해당 사태가 특허권을 가로채려는 미국의 음모라고 주장하며 감행한 폭력적인 행동은 애국주의적 정서와 ‘황우석’을 향한 연민을 바탕으로 한 연대의식이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죠.”

  한때 우리나라 과학계의 위상을 드높인 국민 영웅으로 추대받았으나 연구 부정행위를 저질러 희대의 사기꾼으로 전락한 인물이 있다. 바로 황우석 ‘전前’ 대학교수다. 그가 지난 2004년 ‘사이언스’지에 발표한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세계 최초라는 수식과 함께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지난 2005년 MBC PD수첩의 보도로 해당 논문이 조작된 사실이 폭로됐다. 이에 지난 2006년 서울대 징계위원회는 황우석 전 교수의 파면을 의결했다.

  ‘황우석 사태’ 이후 우리나라 과학계 전반에 크고 작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류범용 교수(동물생명공학과)는 황우석 사태 이후 과학계의 연구윤리가 더욱 강화됐다고 설명한다. “황우석 사태 이후 연구윤리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제도가 생기는 등 과학계의 윤리의식이 제고됐어요. 투명한 연구환경의 정착을 위해 연구윤리 관련 교육사업을 진행하는 등 꾸준한 노력이 필요해요.” 

  실제로 지난 2006년 서울대에서는 <과학과 기술 글쓰기>가 공학인증과목으로 필수 지정됐고 지난 2007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가 「과학기술인 윤리강령」을 선포했다. 또한 지난해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연구윤리강령을 만들기 위해 기존 강령의 개정 논의가 이루어지는 등 연구윤리의식의 재정립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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