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실로 가는 대신 예약된 스튜디오로 발걸음을 옮긴다. 잘 되던 마이크 소리가 안 나오고 말이 자꾸 헛나와 다시 찍기를 반복한다. 강의실에 앉아 눈을 말똥말똥 뜨고 다양한 표정이나 제스쳐로 반응하는 학생들 모습을 상상해보지만 강의 중 자가발전되면서 흥분하기도 했던 예전에 비하면 적정 수준의 각성조차 도달하기 어렵다. 진한 커피를 한잔 들이키고 다시 앉아본다. ... 스튜디오 안의 공기가 점차 이산화탄소로 채워지면서 이게 다 산소 결핍 증상인가 싶고 점점 웃음기는 사그라져가는 것을 느낀다.

  이전에 없었던 팬데믹의 소용돌이 속에서 온라인을 대체해 어찌어찌 일상을 꾸려가고 있긴 하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사회적 존재다. 관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대개 수행이 촉진되는데 사람 각성제가 없으니 단출하다 못해 축축 처지기까지 한다. 면대면 만남이야말로 지적 정보 전달뿐 아니라 정서와 동기까지 꿈틀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당연하게 여겼던 집단의 역동성이 많이 그리워지는 즈음이다.

  반면 불확실성의 터널을 지나가면서 발견한 소중한 몇 가지도 있다. 어쩔 수 없이 속도를 줄이고 멈춰야 하는 시간을 지나가다 보니 나와 늘 함께 있었지만 소중함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첫번째는 가족의 소중함이다. 또 다른 하나는 나에게 필수적인 것이 무엇인지, 부수적인 것은 무엇인지가 자연스럽게 구분된다는 점이다. 마치 나에게 새치염색은 필수였고 파마는 선택이었던 것처럼. 무엇이 필수인지 선택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자신을 풀가동시켜 몰아치지 않았는가 싶다. 더 달리고 싶어도 달릴 수 없고, 쌓고 싶어도 쌓을 수가 없게 되니 드디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멈춤의 미학이다.

  첨단 과학으로조차도 예측은커녕, 대처할만한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이 현실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며 이러저러한 걱정거리를 가동한다. 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가 해를 넘기면 어쩌나 상상조차 끔찍한 생각에 이르면 얼른 다른 주제로 옮겨 버린다. AI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나 등 크고 막연한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대부분 불확실함과 엮여 있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이럴 때일수록 너무 앞서가기보다 현재에, 큰 것보다는 작지만 확실한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오늘 당장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 것이 바람직한지 이미 잘 알고 있다. 온라인 강의라고 해서 느슨해지지 않는 것, 집에서 건강한 밥상을 준비하여 면역력을 갖추고 가족과 정감 있고 유쾌하게 시간을 기획해보고, 바쁘다고 손 놓고 있었던 집안 손질도 하고, 읽고 싶은 책도 읽어보고, 베란다에 화초나 채소도 좀 키워보고, 자신과 다양한 방법으로 깊이 있게 하루하루를 사는 것...

  늘 있는 거니까 당연시하고 소홀히 했던 소소한 것들에 마음을 주어보자. 그것들의 소중함에 감격하고 감사함을 표현해보자.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오지 않았는가. 이젠 경중을 따져가면서 베이직하게 살아보자.

 

권영실 다빈치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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