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정권을 향해 민주화를 외치던 시위뿐만 아니라, 경찰에 연행된 뒤 당한 구타와 물고문까지. 이 모든 장렬한 투쟁과 참혹한 고문은 누군가의 남편 이야기입니다. “며칠 전 처음으로 기고문을 봤습니다. 가슴이 벅차더라고요. 심하게 고문을 당해 그토록 몸이 안 좋았구나.” 지난달 중순, 이창자 동문(보육학과 63학번)은 처음으로 남편 은천기 동문(정치외교학과 59학번)의 기고문을 봤습니다. 1961년 4월 20일 중대신문 제178호에 실렸던 ‘4·19혁명 한돌 맞이 학생 수기’에 실린 은천기 동문의 외침이 60년이 지난 이곳에서 들려옵니다.

이창자 동문(보육학과 63학번. 은천기 동문 아내)
이창자 동문(보육학과 63학번. 은천기 동문 아내)

  지금으로부터 약 60년전 중대신문(1961년 4월 20일 제178호 3면)에 실렸던 4.19혁명 한돌 맞이 학생 수기에 내 남편의 글이 60년이란 세월이 지난 후에야 그 절실한 체험기를 보면서 슬픔이 북받쳐 오르고, 온몸이 떨려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감동이 됐습니다. 

  평소 불의와 비리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더욱더 자신을 혹사 했는지도 모릅니다. 연행돼 혹독한 고문을 당하며 경황이 없던 와중에도 수기문에 기록돼 있듯이 적법절차에 따라 처벌해 달라며 고문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결의를 보여주며 꿋꿋하게 할 말을 한 결과, 고문당한 후 기절하면 물세례로 깨어나고, 깨어나면 교대로 다시 고문하는 과정이 반복되다 보니 온몸의 감각조차 마비되는 혹독한 고통을 겪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리에 총상을 입고 어깨와 팔에 골절까지 입으면서 겪었을 고통과 울분은 얼마나 처참하고 괴로웠겠는지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집니다.

  그때를 회상하기도 싫었던지 4.19와 관련해서는 어느 단체나 모임에도 관여하지 않고 평생을 오직 학문에만 열정을 쏟은 것 같습니다. 고인은 살아생전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다리통증과 온몸이 저리고 아파서 거의 매일 목욕탕에 가다시피 하면서 몸을 다스렸습니다. 그런 가운데 조금만 무리하면 몸이 이상이 와서 안타깝게도 60세가 되기 전에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고인은 수기문에서 ‘다만 그들(의혈의 넋 188명과 수천명의 부상자들)이 우글거리던 부패와 독재의 온상을 태울 수 있는 불꽃과 기름이 되기에 충분했던 우리가 현실을 실망하고 불신해야 할 오늘이 있기에 슬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행히 혁명의 승리가 없었더라면 필자(고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동지가 저세상으로 갔으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020년 4.19혁명 60주년입니다. 다행히 4.19혁명의 밑거름이 된 많은 분이 국가로부터 4.19 공로자와 부상자로 인정받고 있으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많은 분은 오랫동안 잊혀왔습니다.

  이제라도 늦었지만 이번 기회에 민주주의 운동 현장에 열정을 쏟아 고통을 겪었던 고인의 역할이 재조명돼 그에 합당한 예우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사료돼 선처를 구하는 바입니다.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