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말아야 할 봄이 있습니다. 60년 전 봄날의 외침은 우리 가슴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명시하고 있죠. 이는 4·19혁명이 대한민국의 중요한 근간임을 의미합니다. 중앙대 학생들도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위해 교문을 나섰습니다. 민주화를 외치던 거리, 중앙대는 두번째로 많은 희생자가 나온 대학입니다. 의와 참의 정신을 잇기 위해 1960년 4월 19일을 되새겨보려 합니다.

1960년 4월 19일 약 3만명의 학생이 거리로 나왔다. 이승만 정권의 3월 부정선거가 그 원인이었으며 김주열 학생의 죽음은 대규모 시위의 도화선이 됐다. 역사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불의에 항거한 발걸음을 4·19혁명이라 부른다. 그들의 발걸음은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됐다. 4·19혁명의 60번째 봄날, 잊지 말아야 할 그날의 발걸음을 마주했다.

  의를 좇고 참에 살며

  북한산 진달래 능선 아래 푸른 봄빛이 든 곳. 국립4·19민주묘지는 민주화의 가치를 되새기는 공간이다. 정문을 지난 길은 참배로를 품고 있는 잔디광장과 맞닿는다. 참배로 끝에 서서 고개를 들면 21m의 사월학생혁명기념탑을 볼 수 있다.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기념탑은 불의와 독재에 항쟁한 이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기념탑 사이에 위치한 군상환조는 당시 민중의 형상을 보여준다. 고요한 잔디광장에 60년 전 함성이 울리는 듯했다. 군상환조 옆에는 벽면 조각인 군상부조가 병풍처럼 펼쳐져 당시 시대상황과 자유를 향한 염원을 드러낸다.

  군상부조 뒤편에는 4·19혁명 사망자와 부상자, 공로자가 안치된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일렬로 늘어선 묘 옆에는 무거운 공기를 따라 태극기가 펄럭인다. 묘비 앞에는 사진이 붙어있고 사망자의 학교나 거주지가 쓰여있다. 4·19혁명 주체가 학생과 시민이었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4·19혁명에 참여한 김성일 동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의를 좇고 참에 살며 이 땅을 원 없이 사랑했기에 하늘에서 웃고 있으리라.’ 묘비에 새겨진 글자는 우리를 가슴 저린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데려간다.

4·19혁명 당시 경찰의 총격에 흩어지는 시위대와 부상자 모습. 사진제공 100년사편찬위원회
4·19혁명 당시 경찰의 총격에 흩어지는 시위대와 부상자 모습. 사진제공 100년사편찬위원회

  꽃다운 나이에 희생된 6명의 열사

  60년 전 4월 중앙대 학생들은 자유와 정의를 위해 거리로 나갔다. 수천여 명의 재학생들이 ‘불법폭정 바로잡아 민주구국 선봉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참여했고 ‘최후 세력’으로 가장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다.

  시위에 나간 학생 중 6명은 총탄에 맞거나 경찰의 고문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고병래 동문(상학과 58학번), 지영헌 동문(신문학과 59학번), 송규석 동문(정치외교학과 59학번), 전무영 동문(신문학과 60학번)은 당시 내무부 앞에서 희생됐다. 특히 전무영 동문은 입학 18일 만에 순국해 안타까움을 더했다. 송규석 동문은 총탄을 맞고 택시에 실려 갔으나 정릉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또한 김태년 동문(약학과 58학번)은 치안국 무기고 앞 시위상황을 녹음하다 희생됐다. 서현무 동문(법학과 59학번)은 학생시위대 대표로 내무부 장관과 면담을 요청했으나 경찰에 연행돼 고문을 당했고 결국 그해 7월 고문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에 이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고향이나 모교에서는 묘비를 건립했으며 추모 행사도 열렸다. 지영헌 동문의 모교에는 지영헌 열사 추모비가 세워졌으며 그 지역에 4·19혁명 민주금자탑도 지어졌다. 또한 4·19혁명 추모제도 매년 진행하고 있다. 전무영 동문의 경우도 진해시민 및 동창회 등에서 성금을 모아 묘비를 세웠으며 종친회에서 4·19혁명 순국열사 전무영 행정록 등을 제작하기도 했다.

  김태년 동문과 서현무 동문은 4·19혁명 이후 한자리에 안장됐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두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 양가 부모는 1960년 11월 영혼결혼식을 올리고 합장했다. 그러나 1995년 국립4·19민주묘지로 이관하는 과정에서 두 묘가 분장 되고 서현무 동문의 사망원인이 잘못 기재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후 다행히도 20m가량 떨어진 두 묘를 합장하고 사망원인을 정정해 비석을 다시 만들었다. 이로써 두 동문은 현재 같은 곳에서 부부의 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들을 기릴 가치는 충분하기에

  중앙대는 당시 혁명 정신을 기리기 위해 교내 곳곳에 기념 건축물을 세웠다. 대표적으로 의혈탑이 있다. 의혈탑은 1960년 건립 당시 104관(수림과학관) 뒤에 세워졌지만 이후 204관(중앙도서관) 앞으로 이전했다. 4·19혁명에 임한 곧은 태도가 민주주의를 이룩했듯이 의혈탑의 기상은 우거진 수풀 한가운데 우뚝 서 있다. 의혈탑 앞 건립비에는 ‘숭고한 혁명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전 중앙인의 정성과 뜻을 담았다’고 적혀있다. 또한 6명 열사의 추모비 앞에 ‘여기 꽃다운 젊음을 조국과 민주의 제단에 바쳐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젊은 혼들이 있으니 민족의 대지에 피와 살을 묻어 통일을 잉태케 하나니 우리는 이를 의혈이라 부른다’는 문구를 새겨 의혈의 뜻을 담았다.

  의혈탑을 ‘사월’이라 칭했다는 후일담도 있다. 김정일 중앙대학교 4·19혁명기념사업회장은 “조병화 시인은 의혈탑에 사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며 “사월은 남쪽으로부터 꽃이 올라와 중앙대에서 핀다는 의미를 지녔다”이라고 설명했다.

  107관(학생회관)도 4·19혁명 학생의거를 기념하고 당시를 되새기고자 지은 건물이다. 1961년 기공해 1962년 완공했으며 당시 명칭은 ‘4월 학생관’이었다. 4월 학생관은 총학생회, 교내 언론사가 위치하는 등 학생활동의 중심지로 ‘의혈’의 맥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이후 사회과학관, 교양학관 등 명칭 변경을 거쳐 지금의 학생회관이 됐다.

  현재 중앙대에서는 4·19혁명 추모를 위한 기념행사가 매년 열리고 있다. 의혈탑 앞에서 거행되는 4·19혁명 기념식과 총동문회 주관 4.19혁명 기념 중앙인 걷기대회가 이에 해당한다. 그간 기념식에는 총장단과 총동문회 등이 참석해 4·19혁명 희생자를 추모해 왔다. 뿐만 아니라 중앙인 걷기대회에도 여러 동문이 참가해 4·19혁명의 의미를 기리고 있다.

  행사 외에도 4·19혁명 60주년을 맞이해 중앙대는 당시 부상자의 보훈 수혜를 돕고 있다. 100년사편찬위원회 윤형원 팀장은 “동문 부상자 대부분이 보훈 예우 대상제도를 몰라 신청하지 못하고 있다”며 “보훈 제도의 혜택을 제대로 받을 수 있게끔 동문의 보훈 대상자 신청을 돕고 있다”고 말했다.

  모두가 기억하는 4·19가 되려면

  4월 19일. 민주주의가 꽃핀 봄이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지금, 4·19혁명의 가치와 무게를 되새기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김정일 회장은 “중앙대가 혁명의 주역이었음을 기억해달라”고 호소했다. 이에 윤형원 팀장은 “대학본부와 총학생회를 비롯한 학생자치단체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이들의 홍보는 4·19혁명이 학내구성원의 자긍심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고 말했다. 이어 “4·19혁명 당시 중앙대의 기여를 알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며 “이에 대학본부는 언론 홍보와 역사관 설립을 비롯한 다양한 방안을 구상 중이다”고 덧붙였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란 말이 적혀있다. 4·19혁명은 주권을 지키기 위한 발걸음이었으며 중앙대도 그 걸음에 함께했다. 중앙대 학생들은 독재와 부정에 항거하며 의와 참을 외쳤고 민주주의를 지켰다. ‘의혈중앙’은 학내구성원이 함께 민주화 역사를 인식하고 추모할 때 이어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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