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말마다 편의점에서 일한다. 누구나 편하게 방문할 수 있는 장소라 그런지 정말 많은 유형의 사람을 만나게 된다. 대부분 친절하게 대해 주지만, 가끔은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손님도 있다. 그중 제일 기억에 남는 손님은 나한테 심한 욕을 했던 아주머니다. 아주머니는 우리 매장에서 사지 않은 물건을 들고 와서 환불해 달라고 했다. 포스기의 구매 내역, CCTV 어디에도 아주머니의 흔적이 없어 당연히 환불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어떻게든 해 달라고 억지를 부리며 욕을 했다. 내 잘못이 아니기에 더 화가 나고 답답했다. 아주머니와 대치하는 순간에도 그랬지만, 더 속상하고 생각이 많아진 건 그로부터 며칠 후다.
  학교에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다 우연히 그 아주머니를 마주쳤다. 한 손에는 강아지 목줄을 쥐고 있었고, 다른 손에는 강아지 용품을 가득 들고 있었다. 강아지를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보는 아주머니의 눈빛에 정말 놀랐다. 분명히 나에게는 눈을 희번득 뜨며 심한 말을 했는데 강아지는 끔찍하게 아끼다니. 속상함과 동시에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나한테 보여 줬던 안 좋은 모습이 아주머니의 전부라고 생각했을까? 왜 그 아주머니는 누구에게나 화를 내는 사람이라 넘겨짚었을까? 그때 처음으로 사람의 입체성을 고민하게 됐다.
  나는 지금까지 사람을 단편적으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나에게 보여 주는 이미지, 나에게 하는 행동만으로 판단하기 바빴다. 나에게 친절하면 무조건 친절한 사람, 화를 내며 무섭게 굴면 무조건 무서운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타인을 근시안적으로 판단하면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은 입체적이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개념을 넘어 성격 면에서도 그렇다.
  나를 예시로 들어 보겠다. 다른 사람 앞에 서는 일을 꺼리는 성격과 전공단위 학생회장. 결이 다른 두 표현 모두 나를 형용하는 말이다. 학교가 아닌 곳에서 나를 만난 사람은 내가 학생회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학교에서 만난 사람은 내가 다른 사람 앞에 서는 일을 꺼린다고 하면 놀랄 것이다. 내가 고착한 타인의 이미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어떤 누구도 나를 재단할 수 없듯이 나 또한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판단할 수 없다.
  사람의 어떤 모습을 색깔이라고 생각해 보자. 나에게는 빨강을 보여 줬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빨강의 보색인 초록을 보여 줄 수도 있다. 그리고 남에게 보여 주지 않았던 파랑과 노랑이 있을 수도 있다. 이러한 글을 적는 나도 아직은 가끔 누군가를 편집적으로 정의하려고 할 때가 있다. 또 사람이 입체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서 타인과 엮이는 모든 일에 덤덤해질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나에게, 또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다.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 두자는 말이다.
  나무가 아닌 숲을 보자. 나무에 집중하느라 보지 못했던 숲속의 향기로운 꽃, 혹은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최정인 일본어문학전공 학생회장
일본어문학전공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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