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백(Aside)은 연극 용어로 인물이 관객에게 하는 말을 의미합니다. 인물의 곁에서는 듣지 못하기 때문에 오직 관객에게만 들리는 말이죠. 사회를 하나의 무대로 본다면 어떨까요. 이번 학기 중대신문 사회면은 우리 사회라는 무대 위, 누구도 들어주지 않아 방백을 할 수밖에 없던 인물들을 조명하려 합니다.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이 극의 관객이 되어주시겠습니까? 응하셨다면 이번 주는 신체적 재난약자의 방백으로 1막을 열어보려 합니다. 인터미션 후 2막까지 꼭 자리를 지켜주세요. 이제 시작합니다.

 

 

사진 최지환 기자

태풍·지진 등 자연재난, 화재·전기사고를 비롯한 사회재난, 승강기 안전사고 등 생활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 위험까지 재난의 범위는 매우 넓고 다양하다. 재난이 발생하면 누구든 당황할 수 있으며 대피 방법을 찾느라 혼란할 수 있다. 이러한 재난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더욱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대한민국 인구의 약 36%를 차지하는 안전취약계층이다. 기후변화로 자연재해가 증가하고 산업의 고도화로 위험시설의 수도 증가하는 오늘날, 안전취약계층의 재난취약도도 함께 증가하고 있다는데. 그들의 피난길을 함께 걸어봤다.

  재난이 약자를 덮쳐올 때

  안전취약계층이란 장애인, 고령자, 외국인, 저소득층 등 재난에 취약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제3조 9의3에서는 이들을 어린이, 노인, 장애인 등 재난에 취약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안전취약계층은 그 특성에 따라 경제적 재난약자와 신체적 재난약자, 환경적 재난약자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중 신체적 재난약자는 재난 발생 시 자력에 의한 대피, 대응 등 재난 대응 활동이 어려운 사람으로서 장애인, 고령자, 유아 및 아동을 포함한다. 오현문 교수(건설대학원)는 이러한 특성을 고려해 법에서 명시하는 안전취약계층의 개념이 보다 명확해질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안전취약계층의 대상이 매우 포괄적이며 모호합니다. 이는 대상의 특성을 고려해 정책을 개발하거나 집행하기 어렵게 해요.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지원체계 구축을 초래할 수도 있어요.”

  재난 시 신체적 재난약자에게 나타나는 인명피해는 상당하다. 지난 2002년 태풍 ‘루사’ 등 재해로 270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으며 이때 61세 이상 고령자가 약 47%를 차지했다. 지난 2005년 미국을 덮친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요양병원에 있던 환자 34명이 전원 사망하기도 했다. 같은 사건에서 루이지애나주 희생자 중 60대 이상이 약 71%에 달했으며, 이 중 75세 이상 고령자는 약 47%였다. 또한 인구 10만명당 화재 사망자 수는 비장애인이 0.6명인 데 비해 장애인은 2.8명으로 약 4.7배 높게 나타난다.

  위험의 무게는 더해지고

  신체적 재난약자는 외부 위험을 판단하는 데 있어 어려움을 겪는다. 또한 안전 조치 및 대피 등에 필요한 물리적·정신적 역량에서도 비안전취약계층과 차이를 보인다. 윤홍식 교수(성균관대 건설환경공학부)는 재난 상황에서 안전취약계층의 피해가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했다. “화재나 지진과 같은 재난은 예측이 어렵고 빠른 시간에 진행됩니다. 신체적 재난약자는 스스로 대피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재난 대피의 골든타임을 확보하기 어려워요.”

  재난관리는 예방, 대응, 복구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데, 안전취약계층의 경우 대응 단계가 사실상 무효하다. 이기하 교수(경북대 건설방재공학전공)는 안전취약계층의 개인적 재난 대응 능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안전취약계층이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개인적 투자를 하거나 안전장치를 확보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정부, 지자체, 관련 기관 등의 공적인 도움이 필요할 수밖에 없죠.”

  재난 시 자력 대피는 최우선적인 해결방안으로 꼽힌다. 하지만 재난 시 침상 환자를 비롯한 중증장애인은 자력으로 대피가 불가능해 생명을 잃을 위험에 놓인다. 한국재난정보학회 김태환 수석부회장은 재난 상황에서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신체적 재난약자의 특성을 언급했다. “신체적 재난약자는 평상시에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움직여야 하는 사회적 약자를 포함합니다. 각종 재난 상황에서 스스로 대응할 수 있는 준비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가족, 주위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죠.” 지난 2002년 충남 서천 복지원에서 발생한 화재 사고에서 건물 내에 있던 11명 중 9명이 사망했다. 이들은 모두 치매, 지적장애, 시각장애 등으로 거동이 불편해 대피하지 못한 신체적 재난약자였다. 독거노인도 마찬가지다. 재해 정보에 취약하고, 옆에서 신속하게 대피를 도와줄 외부 인력이 없어 대피에 어려움을 겪곤 한다.

  휠체어를 타는 중증장애인이나 누워서 생활하는 침상 환자의 경우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으면 이동이 어렵다. 그러나 화재나 지진이 발생하면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없어 발이 묶인다. 또한 신체적 재난약자는 완강기나 사다리 등 보조 시설을 이용해 대피하기도 어렵다. 윤명오 교수(서울시립대 재난과학과)는 이들이 재난 상황에서 마주하는 제한된 선택권에 관해 이야기했다. “예를 들어 건강한 사람의 경우는 2층에서 불이 난다면 뛰어내릴 수 있겠지만 신체적 재난약자는 뛰어내릴 수 없는 상황이죠.” 실제로 장애인거주시설 재난 안전사고 사례 가운데 화재를 피하지 못해 사망한 사건이 다수 존재한다.

  재난 복구 단계에서도 신체적 재난약자의 취약성이 드러난다. 재난회복력은 재난 발생 이후 일상생활로 복귀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의미한다. 비안전취약계층의 경우 재난 시 피난 행동, 피난 생활, 복구 및 부흥 활동이 가능하지만, 안전취약계층은 이러한 재난회복력을 갖추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채진 교수(목원대 소방안전관리학과)는 신체적 재난약자가 정신적 회복에서도 더딘 모습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재난을 겪으면 재난 상황의 트라우마로 인해 일상생활로 돌아오는 데까지 시간이 걸릴 수 있죠. 사회 활동이 활발할수록 이런 트라우마를 빠르게 극복할 수 있는데 신체적 재난약자는 사회적 관계가 단절된 경우가 비교적 많습니다.”

  안전한 기반은 없는가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제31조 2에는 ‘안전취약계층이 재난이나 그 밖에 각종 사고로부터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생활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안전용품의 제공 및 시설 개선 등 필요한 사항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현행 재난 대응 방침은 화재 등 일부 재난에만 국한돼 있으며 구체성이 부족하고 장기적이지 못하다. 이기하 교수는 해당 법률과 달리 실제 안전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은 매우 미흡하다고 언급했다. “안전취약계층의 안전권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은 개별적 연구 외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대상, 범위, 방법 및 절차 등을 구체화한 사례는 거의 드물죠.”

  신체적 재난약자가 생활하는 요양시설마저도 안전시설 구축이 미흡해 안전권 확보가 불확실하다. 소방공무원 A씨(47)는 고령자와 요양시설의 수가 증가함에도 재난 예방 수준은 미진하다고 지적했다. “요양시설은 고령자나 장애인 등 재난 발생 시 자력으로 대피하기 어려운 사람들로 이뤄져 있어요. 하지만 이들의 신체적 특성이나 질환 등을 고려한 시설 또는 맞춤형 소방시설은 없는 상황입니다.”

  「건축법 시행령」 제46조 6항에서는 노인요양시설, 장애인 거주시설 및 의료재활시설에 관한 대피시설 설치를 의무화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2015년 감사원 조사 결과에 따르면 수도권의 안전취약계층이 거주하는 거주시설 390곳 가운데 약 85%에 해당하는 330곳이 화재 시 임시 피난 장소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초적인 소방시설의 관리 부족도 문제점으로 드러났다. 소방공무원 A씨는 대표적으로 요양시설 내의 소방시설 관리를 비판했다. “스프링클러 등 소방시설이 설치돼 있지만 관리가 되지 않거나, 피난 통로인 비상구가 폐쇄된 경우를 발견했어요. 초기 진화에 필요한 소화기마저 캐비닛에 잠가둔 채 방치된 곳도 많죠. 느린 초동 대처는 인명피해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이어 안전시설을 향한 지속적인 관심을 제언했다. “관계자들은 안전시설을 주기적으로 점검해야 합니다. 유지 및 작동관리도 마찬가지죠. 재난 시 골든타임을 확보하기 위해 열 감지기를 연기 감지기로 교체하고 미끄럼틀과 같은 피난시설 설치를 의무화할 필요도 있습니다.”

  신체적 재난약자가 재난 시 체감하는 위협의 정도는 비안전취약계층 보다 더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을 피할 방법은 오롯이 예방으로 귀결된다. 신체적 재난약자의 특징에 따른 적절한 예방법을 마련할 때 이들의 재난 대응, 복구 능력 또한 함께 향상될 수 있다. 재난 한가운데 서서 그들과 시선을 함께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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