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대거 한국으로 이주해왔다. 그들은 전국 각지의 주요 도시에 한국인 밀집 지역을 벗어났지만 도심에 가까운 곳을 개발하여 살았다. 이런 곳은 일제 강점기에 신시가지로 발전하였고, 광복 이후에도 도심으로 유지되었다. 서울의 대표적인 일본인 밀집 거주 지역으로 발전된 곳은 진고개 일대이다. 그리 높지 않은 고개가 많은 지역이지만 진창이어서 집을 짓고 살기에 불편한 곳이기 때문에 한국인이 별로 살지 않은 지역이었다. 이곳은 오늘날 명동과 충무로 일대이다. 

  중앙대학교 인근에도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이 개발한 주택지가 있다. 명수대가 바로 그곳이다. 서울지명사전에 따르면 ‘명수대는 서달산 꼭대기에 있던 건물로 일본인 부호 목하영이 이곳에 별장과 놀이터를 만든 다음, 맑은 한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경치 좋은 곳이라고 이름 붙인 것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일부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 서달산은 동작구 국립현충원 뒷산으로 그 줄기가 한강대교 인근까지 뻗어있다. 그 꼭대기에 별장을 짓기는 어렵다.

  명수대의 근원은 스나모토 후미이고가 2009년 발표한 ‘경성부의 교외 주택지에 관한 연구’에 자세히 나온다. 이 논문에 따르면 명수대는 1929년 일본인 기노시타 사카에가 한강대교 가까이에 있는 일본 한강신사(현 효사정) 인근 흑석동 지역에 주택지를 개발하기 위해 명수대토지사무소를 건립하며 지었다. 기노시타 사가에는 한강 인근 저습지에 화려한 일본식 연못을 건립하여 명수호(과거 연못시장이라고 불렸던 중대병원 건너편 일대)라고 불렀고, 주변에 일본신사와 명수대유원지를 건립하는 등 80만 평의 부지를 개발하였다. 물론 자신이 사는 주택도 지었다. 당시 주민등록에 따르면 130세대의 일본인이 이곳에 거주했다.

  명수대는 1960년대까지 명수대초등학교, 명수대성당, 명수대교회 등 보편화된 이름으로 불렸다. 이후 명수대라는 이름은 점차 사라지는 추세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명수대국민학교는 1996년 흑석초등학교로 개명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명수대라는 이름의 흔적은 명수대아파트, 명수대현대아파트, 흑석동명수대현대아파트, 명수대교회, 명수대한의원 등으로 남아 있다.

  중앙대학교도 명수대와 무관하지 않다. 중앙대학교 교가에 ‘명수대 송림 속에 우뚝 선 중앙’이라는 문장이 있다. 좋은 뜻으로 새기면 맑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아래, 울창한 소나무 숲 한가운데 지은 중앙대학교로 인식될 수도 있다. 그러나 명수대의 어원을 따져 볼 때 그리 유쾌하지 않다.

  일제의 잔재라고 해서 모두 폐기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명수대라는 이름을 고집할 필요도 없다. 명수대는 분명 자랑스럽지 않은 일제의 잔재이다.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사학의 명문 중앙대학교가 명수대를 굳이 교가에 넣을 필요는 없다.

  이제라도 중앙대학교 교가 안에 있는 명수대를 적절한 이름으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 대안으로 ‘서달산 송림 속’ 또는 ‘흑석골 송림 속’을 제안한다.


박희봉 교수 공공인재학부 / 사과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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