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남사당과 신명난 한마당!
  • 김민지
  • 승인 2019.10.07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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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들썩였던 흥

 

안성남사당공연장에서 바우덕이 풍물단이 버나놀이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 안성시청
안성남사당공연장에서 바우덕이 풍물단이 버나놀이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 안성시청

마당을 찾아 8도를 떠돌다
풍악이 울면 민중은 웃고

“징한 놈의 이 세상, 한 바탕 신나게 놀고 가면 그뿐” 영화 <왕의 남자>의 장생과 공길은 남사당패의 광대로 등장한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횃불이 밝혀지고 마을 장터는 남사당패의 놀이판이 된다. 동이 틀 때까지 풍물 소리에 맞춰 신명나게 춤을 추는 그들의 모습은 행복하기 그지없다. 남사당패는 천민 신분으로 전국을 떠돌며 민중을 위한 공연을 펼쳤다. 지배층의 수모에도 굴하지 않았던 그들의 열기는 이곳 안성에 진하게 남았다.

  우리 공연하게 해주세요
  조선 후기 대중음악의 판을 꽉 잡던 자들이 있었다. 대중음악을 이끌며 민중들의 연예인이 됐던 남사당패가 그 주인공이다. 당시 판소리와 궁중음악인 아악은 특정 계층이 누리던 음악으로 대중성이 없었다.
  남사당패는 남성만으로 구성된 유랑예인집단으로 사당패에 이어 등장했다. 사당은 절에 기거하지만 중이 아닌 여성을 부르는 말이다. 사당들은 무리를 지어 노래와 춤 위주의 공연을 펼치며 사당패로 활동했다. 홍원의 학예연구사(안성맞춤박물관)는 남사당패가 등장한 배경이 자극적인 공연의 유행이라고 설명한다. “조선 후기에 들어 자극적인 기예가 유입돼 춤과 노래는 경쟁력을 잃게 됐어요. 그래서 남성들이 신체 기예를 위주로 공연하는 남사당패가 등장하게 된 거죠.”
  남사당패는 평민의 편에 서서 양반 세계를 비판하는 마당놀이를 펼쳤다. 때문에 민중에게는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지배층에게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천민의 신분을 타고나 가장 천대받는 부류였고 사회로부터도 격리 당했다. 따라서 마을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었으며 공연 허가를 내주는 장터, 마을 행사 등을 찾아다녀야 했다.
  남사당패는 주로 가난한 농가 출신 혹은 고아들로 이뤄져 있었으며 내부 규율이 엄격한 집단이었다. 위계질서를 지키지 않은 사람은 우두머리인 꼭두쇠의 처벌을 받아 곤장을 맞거나 밥을 굶었고 때로는 쫓겨나기도 했다. 주어진 업무도 철저하게 나눠진 전문화된 공연집단이었다.
  남사당패 구성원의 역할은 5개로 분류된다. 패거리의 우두머리인 꼭두쇠는 남사당패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책임을 졌다. 꼭두쇠는 한 패거리에 단 1명만 존재하며 엄격한 명령과 규율로 패를 통제했다. 곰뱅이쇠는 패거리의 2인자로서 마을에서 공연 허가를 받는 역할을 담당했다. ‘곰뱅이 트다’는 남사당패의 은어로 공연 허가를 의미한다. 그 외에는 각 연희분야의 우두머리인 뜬쇠, 기예를 처음 배우는 초보자인 삐리, 장비를 운반하는 나귀쇠가 있었다. 초입자인 삐리는 뜬쇠 아래에서 재주를 익혀 성장했는데 공연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여장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잘하면 살판이요, 못하면 죽을 판이다
  현재 계승되고 있는 ‘남사당놀이’는 총 여섯 마당으로 구성된다. 여섯 마당은 풍물놀이, 버나(접시 돌리기), 살판(땅 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춤), 덜미(꼭두각시 놀음)로 이뤄진다.
  풍물놀이는 남사당놀이에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꽹과리, 장구, 북, 징, 소고, 태평소 등의 악기 연주로 다채로운 공연이 펼쳐진다. 버나는 재주꾼들이 재담을 주고받으며 접시 모양의 곡물 거름채인 버나를 높이 던지고 받아내는 공연이다. 살판은 어릿광대와 꾼이 서로 땅재주를 부리는 놀이로 ‘잘하면 살판이요. 못하면 죽을 판이다.’라는 말에서 ‘살판’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어름은 얼음 위를 조심스레 걷듯이 진행되는 줄타기 놀이다. 덧뵈기는 ‘탈을 쓰고 덧본다’는 뜻에서 비롯한 남사당패의 ‘탈춤놀이’며 덜미는 우리나라 민속 인형극 꼭두각시 놀음이다.

  꺼진 남사당도 다시 보자
  남사당패는 1930년대까지 전국을 유랑하면서 공연을 펼쳤다. 하지만 이후 급격한 사회 변화를 겪으며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남사당패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던 1890년대 후반을 지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며 남사당패는 전국적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그 인기도 거의 사라졌다. 남사당패의 일원은 급격히 줄기 시작했고 사라질 위기를 맞았다.
  이에 1970년대 남사당패의 일원이었던 김덕수가 장단 중 일부분을 모으거나 변형해 신나는 가락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사물놀이다. 사물놀이의 등장으로 식었던 남사당패의 인기는 다시 살아났다. 1980년대에는 사라져가는 남사당패의 문화를 살리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1982년 안성에서 꼭두쇠 김기복 선생을 주축으로 ‘안성남사당보존회’가 결성됐다. 안성남사당보존회 성광우 회장이 김기복 선생 덕분에 지금까지 남사당패 문화가 계승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당시 김기복 선생님께서 안성 남사당패의 가락과 멋을 복원해 전수 활동을 하셨어요. 그로 인해 지금까지 남사당패 정신이 이어질 수 있죠.” 안성남사당보존회의 안성남사당풍물놀이는 1989년 제30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으며 2009년 9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2년에는 남사당패를 계승할 목적으로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 풍물단(바우덕이 풍물단)이 창단됐다. 성광우 회장은 바우덕이 풍물단이 전통 공연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고 소개하며 관객들과 함께 즐기는 ‘뒷풀이’가 대미를 장식한다고 말한다. “남사당놀이는 남녀노소 즐길 수 있는 공연이에요. 뒷풀이는 관객들과 함께 춤과 노래로 하나 되는 시간이죠. 공연이 끝나고 남은 여운을 폭파시킬 수 있답니다.”

  상모와 함께 지구촌을 돌다
  바우덕이 풍물단의 영향으로 평택시립농악단, 광주시립광지원농악단 등 경기도 내 시립 예술단이 창단됐다. 바우덕이 풍물단은 다른 지역에 자문으로 참여할 정도로 국내 지역문화예술의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활발한 해외공연도 펼치고 있다. 2003년 터키에서 열린 씨오프 세계민속축전 참여가 그 시작이었다. 바우덕이 풍물단 김동규 단원은 참여한 해외공연 중 다른 국가 사람들과 함께 합주를 한 경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다. “프랑스에서 열린 공연이었는데, 여러 나라 사람들과 함께 공연한 적이 있어요. 아프리카, 유럽, 남미 등 전통 악기들과 합주를 하며 느낀 떨림은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바우덕이 풍물단의 영향으로 평택시립농악단, 광주시립광지원농악단 등 경기도 내 시립 예술단이 창단됐다. 바우덕이 풍물단은 다른 지역에 자문으로 참여할 정도로 국내 지역문화예술의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활발한 해외공연도 펼치고 있다. 2003년 터키에서 열린 씨오프 세계민속축전 참여가 그 시작이었다. 바우덕이 풍물단 김동규 단원은 참여한 해외공연 중 다른 국가 사람들과 함께 합주를 한 경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다. “프랑스에서 열린 공연이었는데, 여러 나라 사람들과 함께 공연한 적이 있어요. 아프리카, 유럽, 남미 등 전통 악기들과 합주를 하며 느낀 떨림은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단순히 생김새만을 보고 국적을 구분해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바우덕이 풍물단이 상모를 쓰고 풍물의상을 갖추면 외국인들도 단번에 한국인임을 알아본다고 한다. 성광우 회장은 해외공연을 다니며 한국의 전통 풍물놀이를 알리는 일이 자랑스럽다고 이야기한다. “아침에 외국인 단원들을 마주쳤는데 상모를 돌리는 시늉을 하며 반갑게 인사하더라고요. 풍물놀이를 한국의 전통놀이로써 알릴 수 있어 기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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