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신문을 두고 한 선배 기자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선배는 중대신문이 학내 사안에서 객관성을 가지려다 보니 명확한 지지층이 없다고 말했다. 충성 있는 독자층이 적어 영향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추측도 곁들였다. 당장 인터넷 뉴스만 봐도 공영방송인 KBS보다 조선일보 기사의 댓글이 많은 현실이다.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중대신문 대학보도부는 어디로 가야 할까. 답을 찾기 위해 처음 취재에 나가던 시절을 떠올려봤다.

  중대신문에 들어와 오직 대학보도부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스스로가 부족하다 느껴 지난 몇년 치 기사를 계속해서 읽었던 정기자 시절도 있었다. 덕분에 학내 사안에 무지하지는 않은 상태로 취재원과 깊게 대화할 수 있었다. 그렇게 깊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레 중대신문 이야기도 나오기 마련이었다. 

  유난히 자주 듣는 말이 있었다. 기계적 중립. 그들은 중대신문이 기계적 중립에 갇혀있을 뿐만 아니라 벗어나려 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 취재원은 예전 기사를 가져오며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이 기사를 쓴 중대신문 기자는 과연 사안을 얼마만큼 아느냐고. 정말 자신 있게 안다고 말할 수 있냐고.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몇달, 몇년에 걸쳐 진행된 일을 며칠만에 완전히 파악하기는 어려운 일일 테니까. 

  그러나 단언컨대 중대신문 대학보도부 기자라면 해내야 한다. 그 누구보다 많이 알아야 한다. 지난 몇년간의 과정을 모두 따져봐야 한다. 누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취재해야 한다. 

  기계적 중립이라는 비판은 모두의 입장을 담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기사가 핵심을 관통하지 못하고 양측의 입장을 정리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기자가 ‘적당히’ 알고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면 기사가 흔들린다. 기자도 그 함정에 빠질 뻔한 적이 있다. 그때 기자를 도운 사람은 핵심 취재원과 같은 집단에 속한 주변 사람들이었다. 자기는 어떤 말도 해주고 싶지 않다던 그들을 설득한 일이 발단이었다. 기사에는 실리지 않아도 이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틀을 완성할 수 있었다. 

  지금도 잊을 수가 없는 건 그렇게 얻어온 정보를 듣고 깜짝 놀라 굳어진 핵심 취재원의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보고 생각을 굳혔다. 조금이라도 모르고 넘어가지 않겠다고. 날카롭진 못해도 뿌리 깊은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기계적 중립이라는 비판에 직면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마지막으로 기계적 중립을 없애고 싶었던 이유는 어떻게든 신문사를 흔들려는 이들에게서 선배들이 지켜온 대학보도부에 틈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쁜 글을 쓰지 않겠다며 두려움이 없었던 선배는 나로 하여금 말도 안 되는 취재까지 가능하게 만들었다. 중심을 잡아주던 선배는 내가 취재해온 방대한 정보에서 늘 핵심을 짚어줬다. 이제 기자는 대학보도부가 기계적 중립에 빠지지 않도록 이끌어 주려 한다. 그래서 기자는 기억되지 않고 중대신문만이 오롯이 남기를 전심으로 바란다. 

박성배 대학보도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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