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지새운 시간도 어느새 2년을 목전에 두고 있다. 기자는 최근 대학보도부에 발을 들였지만 아직도 지난 1년동안 몸담았던 기획부 시절을 답습하고 있다. 지난학기 기획부에서 다뤘던 소수자 담론은 늘 민감하기 마련이었다. 기사의 무게 탓인지 취재원이 답변을 포기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때의 경험에서 오히려 포기를 용인하는 좋지 못한 태도가 자리 잡았다. 포기는 하던 일을 도중에 그만두거나 권리, 자격 등을 내던져버린다는 두가지 뜻을 내포한다. 전자가 단순히 행위의 멈춤이라면 후자는 어떤 가치를 우선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문제에 가깝다.

  장애 학생의 입시 학습권을 취재했던 적이 있다. 당시 취재원이었던 한 장애 학생은 태어나서 지금껏 권리를 보장받아본 적이 없었다며 애초에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불편을 겪을 때도 그저 ‘그러려니’ 여기며 살아온 탓에 자신은 취재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말이 이어졌다. 그는 단순히 취재 요청에만 답변을 포기한 게 아니었다. 인생 전반에 걸쳐 당연했어야 할 권리에 대한 체념 섞인 포기였다.

  과거의 일화를 상기하게 된 건 얼마 전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한 중앙감사위원회(중감위) 간담회에 다녀온 후부터다. 간담회에서는 학생 단체의 대표자를 비롯해 많은 학생이 총학생회장에게 중감위와 관련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던 중 질의응답의 흐름이 장애인권위원회(장인위)설립과 관련한 물음으로 이어졌다. 공간 대책이 마련되기도 전 중감위 설립을 진행할 생각이냐는 질문이 제시됐고 공간 마련 대책이 있음에도 장인위 설립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를 묻는 질문이 뒤따랐다. “장인위 설립 논의는 이번 간담회와 직접적 관련이 없다”는 답변으로 모든 질문이 일축됐다. 자명하게 제시돼야 했을 답변은 응답자가 스스로의 의지로 포기했다. 그날 간담회에 참여했던 다수가 중감위와 장인위 공간 문제를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했으나 돌아오는 답변은 없었다.

  총학의 포기는 자의에 의해 이뤄졌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대상보다 ‘더 중대한 가치가 있어서’라는 까닭이 붙는 두번째 의미의 포기다. 기자는 질의만 있고 응답은 없었던 포기의 현장에서 과거 취재원이었던 장애 학생을 떠올렸다. 누군가의 포기 때문에 기본권을 ‘포기당한’ 그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비단 그때의 장애 학생만이 포기당하는 건 아닐 테다.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하는 희망을 포기하도록 내몰아버린 건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이들의 잘못이 아닐까.
 

  이번 학기에는 포기를 쉽게 용인하지 않으려 한다. 혹자의 포기가 자칫 누군가에게는 권리의 존명을 위협하는 존재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중요함이라는 잣대의 경중에서 밀린 대상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이에 어떤 사안이라도 쉽게 포기되지 않고 누구도 자신의 목소리를 포기하지 않도록 ‘포기’에 대한 기자의 태도를 바로잡는다. 귀한 지면의 한칸을 빌어 말하건대 기자 역시 매 순간 포기하지 않고 펜을 잡겠다고 진중한 다짐도 함께 남긴다.

노유림 대학보도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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