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7년 정의당 윤소하 의원은 「약사법」, 「건강기능식품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발의안은 안전상비의약품 등 총리령으로 정하는 의약품의 용기·포장에 제품명, 효능·효과, 용법·용량을 점자 및 음성변환용 코드로 표시하도록 개정하자는 내용이다.

  소비자의 알 권리를 보장하고 의약품의 오남용을 방지할 수 있단 점에서 해당 개정안은 통과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 한국제약바이오협회, 한국의약품수출입협회 등의 반대로 해당 개정안은 여전히 계류 중이다. 근거는 ‘실효성 부족’이었다. ‘필요하다면’ 안전상비의약품에만 표기를 의무화하잔다. 실효성을 운운하는 건 속 편한 자의 안일한 단언이다.

  현행 「의약품 등의 안전에 관한 규칙」 제69조 ‘의약품의 표시 및 기재사항’에 따르면 의약품의 용기나 포장에는 성상, 효능·효과, 저장 방법, 제조공정을 기재해야만 한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을 위해선 제품명, 품목허가를 받은 자, 수입자의 상호는 점자 표기를 병행‘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점자 표기의 선택이 제조사에 달려있다 보니, 실제 품목허가·신고된 의약품 전체 39803개 중 점자 표시 품목은 약 0.2%에 불과하다. 시각장애인의 정보 접근과 활용을 제조사에 맡기고 있는 현행 제도의 부당함을 보여주는 수치다.

  ‘안전상비의약품 약국 외 판매 제도’는 국민이 약품에 쉽게 접근하도록 돕기 위해 보건복지부가 지난 2012년에 도입한 정책이다. 해당 제도 시행으로 판매 자격을 갖춘 점포에서 안전상비의약품 총 13개를 판매하고 있다. 이 중 점자로 표기된 제품은 겨우 4개다. 국민의 ‘쉬운 접근’이란 정책의 취지가 무색하다.

  겨우 점자로 표기된 의약품을 찾았더라도 중구난방으로 기재된 점자는 또 다른 혼란을 낳는다. 명문화된 기준이 없어 제조사마다 점자의 크기·높이·간격·위치 등이 제각기 다르다. 표기 내용도 기준이 없어 상품명만을 점자로 기록한 경우도 있다. 소화제가 아니라 ‘베아제’, 잇몸 약이 아니라 ‘인사돌’. 정작 중요한 약의 용법과 효능은 생략된다. 제도의 부재가 낳은 또 다른 부작용이다.

  일각에서는 음성변환용 코드 활용 등 정보제공시스템 구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디지털 소외계층에 해당하는 시각장애인과 시·청각 장애인의 정보 격차까지는 포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외 하나를 해결하자고 또 다른 소외를 만드는 격이다. 비장애인이 문자 없이 디지털만으로 살아갈 수 없듯, 시각장애인이 점자를 배제하고 디지털에만 의존해서 살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의약품 점자 표기 의무화는 여전히 답보상태다. 사회 구성원의 기본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주체적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 권장과 의무의 무게는 다르다. 현실이 이렇게 지끈거리는데도 스스로 두통약 하나 사 먹을 수 없는 시각장애인의 현실을 더는 묵과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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